헬라어 원문 보면 ‘호의’ 얻었다 아닌 나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무언가가 전해지는 것
영적 축복 물론, 물질적 축복까지 함께 나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모습.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中

1.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한국의 주요 종교들에 대한 신뢰도 조사를 보면, 여기서 언급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기독교는 매우 낮은 신뢰도를 보여줍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왜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한국 근대화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무리하게 한국 유교의 핵심인 조상 숭배를 거부하여 많은 희생을 낸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는 많은 병원과 학교 건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국민들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그들의 힘들고 아픈 부분들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근대화에서 지도자 역할을 해낸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성경 읽기를 통해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국민들 문맹률을 기록적으로 낮췄습니다.

계몽 운동을 통해, 외부 세계의 변화를 알지 못하던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기술을 소개해 줬고, 또 여권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처럼 지난 세기 동안 교회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는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개신교는 한국 최대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 모습을 보면 너무 처참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이타적 종교 단체의 이미지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익집단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 예배 모습.

2. 교회 문제의 근원

종교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이유는 교회의 재정 문제와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도 심각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더불어 미래를 향한 비전을 상실한 교회의 자기중심적 편협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개교회주의와 개교단주의를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해 왔습니다.

가톨릭과는 달리 통합의 구심점을 갖고 있지 못한 개신교는 어떻게 하든 자신의 교단과 교회만 성장시키면 된다는 사고 방식을 보편화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복음의 실천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회’가 아니라 ‘사람의 회’에 불과함을 잊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자신의 교회부터 잘 관리하고 성장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여기에만 몰두하다 보면 예수님의 눈으로 전체 교회를 살펴보려는 노력이 부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교회주의나 개교단주의는 결국 스스로를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아무리 내 교회나 교단이 성장을 하더라도 교회 전체가 세상 사람들의 미움이나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궁극적으로는 내 교회마져도 고립되는 결과로 귀결될 것입니다.

특히 전체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장치가 부족한 개신교는 이런 종류의 위기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신뢰도를 회복할 수 있는 답을 어디서 구할 것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초대교회를 자주 언급해 왔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소유물을 서로 통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며, 함께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현대 교회가 따라야 할 모델로 자주 거론합니다.

혹자는 이런 나눔의 삶이 바로 개인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 사상이라 생각하고 초대교회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 재산을 부정하고 강제로 압류하는 공산주의와 달리, 초대교회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산 헌납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쓰고 남은 것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카타콤)에서 예배드렸다.

3. 초대교회의 참된 모습

이런 초대교회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바로 사도행전 2장 42-47절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올바로 해석돼 왔는지는 의문입니다.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여 실천하면 양약이 되겠지만, 반대로 잘못 해석해 실천하면 오히려 독약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1) 42절의 역할

먼저 42절을 베드로 설교(2:14-41)와 초대교회 활동(2:43-47) 중에서 어느 것과 연결시켜 읽을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개역개정을 보면 42절은 베드로 설교(2장 14-41절) 단락에 속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에 의하여 전도된 3천명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렇게 읽는다면 43절부터가 전체 초대교회에 적용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물론 이런 해석도 나름대로의 근거는 있습니다. 먼저 42절 3인칭 복수인 본동사의 주어에 대한 선행사가 41절에 나오는 3천 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떡을 떼는 것(즉 성찬 예식을 의미함)”이 46절에도 나오기 때문에, 한 단락 내의 반복으로 보는 것보다 서로 다른 단락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설명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약점도 있습니다. 즉 사도들에 관한 이야기가 43절에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42절과 43절을 하나의 주제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의 가르침만 아니라 사도들을 통하여 보여지는 기사와 표적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즉 42-43절은 사도들이 가르침과 기사 이적에서 가지고 있는 절대적 권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묶음입니다.

또 42절 본동사의 주어에 대한 선행사를 꼭 앞에서만 찾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후행사가 존재하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헬라어 특성상 문맥에서 선행사나 후행사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42-43절을 같은 내용을 다루는 하나의 구조로 보면, ‘모든 사람들’이 후행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떡을 떼는 성찬예식’이 반드시 동일한 성찬 예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42절의 성찬예식이 사도들과 함께 하는 공동예배에서의 성찬예식을 말한다면, 46절에 나오는 성찬예식은 가정예배에서 행하는 성찬 예식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46절에는 분명하게 “집에서 떡을 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인가?

위에서 보여준 것처럼 42-43절이 사도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44-47a까지는 각 교인들이 교회와 가정에서 어떻게 생활하였는지 설명하여 주는 부분입니다.

개역개정은 43절부터 47절까지를 모두 한 문장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어 성경은 44절부터 47a까지만을 한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성경의 장과 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구조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
1.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사 이적(42-43절)
2. 교인들의 헌신적 종교생활(44-47a절)
3. 하나님의 교회 부흥(47b)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43-47절을 한 문장으로 해석한 개역개정을 읽다 보면, 마치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인 것처럼 오역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또 온 백성에게 칭송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즉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으로 초대교회가 부흥한 것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지금까지 대체로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서로 음식을 나누며 온전한 예배를 드림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 것으로 해석된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해석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의 구조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원문 구조에서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키신 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칭송을 받는 것은 초대교회 부흥의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칭송을 부흥의 원인으로 보게 되면, 지금의 개교회주의와 개교단주의는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초대교회를 부흥시키신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또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도 초대교회를 칭찬하였고 또 결과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 교회 부흥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성지 이야기 3 에베소 사도 요한
▲에베소 사도 요한 기념교회 입구에 있는 ‘박해의 문’. ⓒ크투 DB

3) “온 백성의 칭송”은 올바른 번역인가?

초대교회의 부흥 원인을 파악하는데 있어 더 중요한 문제는 과연 원문의 해석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야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는 것인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칭찬이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먼저 구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으로, 절대 교회의 최고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연 원문에 대한 이런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이 구절에 대한 영어 성경들의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njoying the favor of all the people (NIV)
having the goodwill of all the people (NRS)
hav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NAS)
enjoying favor with all the people (NAB)

여기서 우리는 영어 성경의 해석이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NIV와 NRS는 “세상 사람들의 호의(칭찬)를 얻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반면, NAS와 NAB는 “세상 사람들과 호의(은혜)를 나누었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번역일까요? 먼저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ἔχοντες χάριν πρὸς ὅλον τὸν λαόν.

이 원문의 해석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명사 카리스(χάρις)의 의미입니다. 카리스는 ‘칭찬’이라는 의미보다 대체로 ‘은혜, 호의, 선의(grace, favor, goodwill)’ 등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칭찬’은 지나치게 강렬한 반응이며, 믿지 않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호의(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칭찬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이 구절의 해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전치사 πρὸς 입니다. 이 전치사는 소유격, 여격, 목적격 명사와 함께 사용될 수 있는데, 그 활용법이 비교적 복잡합니다.

이 전치사 뒤에 목적격 명사가 올 때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장소를 향한 움직임(motion to a place; toward)’이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즉 전치사의 기본 개념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가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인가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야 올바른 해석이 됩니다.

즉 초대교회가 수동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받은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무엇을 주었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카리스, 즉 ‘칭찬’이 아니라 ‘은혜’나 ‘호의’ 입니다. 이런 점에서 헬라어 본문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으니”라고 번역하기보다 “온 백성들과 은혜(혹은 호의)를 나누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헬라어 문법이나 문맥, 나아가 기독교 교리에 비추어 볼 때 훨씬 잘 어울립니다.

만약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으니”라고 해석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칭찬은 하나님을 찬양하여 얻은 것이기보다 소유한 것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들로 이들의 칭찬은 서로 나누며 돕는 교회 생활을 관찰한 결과로 생긴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은 접속부사 ‘카이(그리고; καὶ)’로 연결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이웃과 카리스를 함께 나누는 것을 순접의 병행 관계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율법의 두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또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온 백성들과 나눈 은혜 혹은 호의의 내용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문맥에서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는 영적인 축복은 물론 물질적인 축복까지 포함된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끼리만 나누지 않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보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뽑게 된 동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행 6:1-7).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것을 보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까지 구제품을 나누는 것은 사도들이 해왔으나, 이후 일곱 집사를 선정하여 교회 행정을 맡도록 한 것인데 구제는 분명히 초대교회의 큰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초대교회
▲함께 떡을 떼는 초대교회 가정 예배 모습.
4. 맺는 말

초대교회 활동을 보여주는 이 본문에 세상 사람들의 칭찬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굉장히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도 전치사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초대교회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성경 해석이 맞는다면, 이제부터 한국교회는 각 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내부적으로만 나눌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을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짓고 많은 유명 인사들을 모아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모아진 헌금과 자산을 세상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는 작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은 화려하고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마치 교회 부흥의 상징인 것처럼 돼 버렸고, 따라서 각 교회는 부흥을 자랑하기 위해 더욱 경쟁적으로 호화로운 교회 빌딩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보다 더 크고 화려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복음 전파라는 교회의 사명을 망각한 행위입니다.

물론 깨끗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편안함/안락함이라는 유혹에 빠지는 순간 교회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소위 ‘잘 나가는’ 교회들이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다가 망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화려한 건물이 그곳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의 성공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그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런 교회의 대표적 예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 4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로 이 지역의 모든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풍족한 삶을 누리는 도시였습니다. 이곳에 위치했던 에베소 교회도 물질의 달콤함에 빠져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계 2:1-7).

에베소 교회는 초창기 많은 박해로 인하여 매우 힘든 신앙생활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인내하고 또 부지런하여 마침내 큰 교회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유하게 된 이들은 복음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됐고,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준엄한 경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부흥하고 있는 교회들도 개척교회 때의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면 그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계 2:4-5).

처음 개척교회를 할 때 간직하던 ‘처음 사랑’을 끝까지 유지해야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인간의 복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또 그렇게 해야 한국교회의 신뢰도도 회복될 것입니다.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