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왕조, 자비 대신 철저하고 잔인한 보복
비옥한 초승달 지역, 기름진 토양 대신 지하자원 부족
이집트와 달리 무역이 필수, 정복이 훨씬 이득 깨달아
집단 농업체제와 도시국가 건설, 패권 경쟁 치열해져

구약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승달
▲전형적인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의 모습.

들어가는 말

신앗시리아 제국(B.C. 911-609)과 신바빌로니아 제국(B.C. 626-539)은 잔인함으로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애굽과 비교하여 볼 때 메소포타미아의 잔인함은 마치 전매특허를 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잔인함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막대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 언약에 따라 다윗 후손이 왕위를 이어간 남유다 중심으로 기록된 성경은 북이스라엘 멸망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성경 기록과 성경 외에 남아있는 역사 기록들을 살펴보면 앗시리아 제국이 얼마나 전쟁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앗수르 제국 부흥에 초석을 놓은 아수르나시르팔 2세(B.C. 883-859)는 잔인한 정복을 통한 팽창 정책으로 특히 유명합니다. 그가 얼마나 잔인하였는지, 주변 국가의 왕들은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딱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 발을 끌어안고 말했다. 당신 마음대로 죽이소서. 당신 마음대로 살리소서. 당신 마음대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소서.”

그들은 포로의 손이나 발을 자르고 또 한쪽 눈알을 뽑아 무기를 들고 전투를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잡힌 포로들을 저항하는 도시의 성문 앞 장대에 매달아 놓고 산채로 생가죽을 벗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성 안에 있는 저항군들이 그 잔인함을 보고 다시는 대항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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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르나시르팔 2세.
나아가 이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점령된 곳의 주민들을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맞바꿔 살도록 했는데, 이는 아예 반란의 근거지를 없애 버리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B.C.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신앗시리아 제국은 병자와 빈곤층을 제외하고, 왕족과 귀족들을 포함한 10개 지파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 앗시리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이때 잡혀간 북이스라엘 10개 지파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기록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대신 북이스라엘 지역에는 어디서 왔는지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사마리아인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혼합된 형태의 유사 유대교로 개종한 다음, 모세오경만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며 지금까지 그리심산 주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앗시리아 왕국의 이런 잔인함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신앗시리아보다 조금은 덜하였을지 모르지만, 반란군에 대한 잔인한 처벌과 이주 정책은 마찬가지였습니다.

B.C. 586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멸망당한 남유다의 왕족과 백성들도 바벨론 지역으로 잡혀갔습니다.

열왕기하 25장 7절에 기록된 남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들의 잔인성을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 막대기’로써 사용할 정도로 잔인함의 대명사가 된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은 왜 피정복 국가들에 대하여 그토록 잔혹한 정책을 펼쳤을까요?

물론 유별나게 잔혹하기로 이름을 떨친 왕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이 이런 잔혹한 정책을 펼친 것에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만이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환경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몇몇 환경은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신 철저하게 ‘보복’을 가하여,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잔인함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환경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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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를 장대에 매다는 앗수르 군인들.

1. 지하자원이 전혀 없는 메소포타미아

이란판과 아프리카판이 충돌하여 만들어진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원래 깊은 계곡이었습니다. 상류 쪽에서는 아라랏산의 눈 녹은 물과 빗물이 흘러내려오고, 하류 쪽에서는 걸프만의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매우 혼란스러운 곳이 바로 이 계곡이었습니다.

이 지역의 혼란한 상태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누마 엘리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태초에는 바닷물의 여신인 티아맛과 민물의 남신인 압수만 존재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깊은 계곡에 빗물과 강물에 휩쓸려 내려온 토사들이 쌓이기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넓은 충적토 평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 (땅)”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에서 온 지명으로,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충적토로 이루어진 넓은 평야 지대를 의미합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속하는 이 지역은 기름진 토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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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도.

그러나 이처럼 충적토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보니 대신 이곳에는 금, 은, 구리, 철, 대리석 등 일체의 지하자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발생하고 성장하려면 지하자원이 필수 요소인데, 메소포타미아는 이런 것들이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초기의 성장은 경쟁 상대인 애굽에 비하여 한참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메마른 충적토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들이 자라는 숲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따르면, 높은 산에 위치한 숲은 매우 신비스러운 곳이었고 또 신들이 거주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에는 숲이 없었기 때문에 목재가 매우 귀했고 모두 수입에 의존하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식량은 풍부하였지만 지하자원이 하나도 없는 충적토 평야에서 사는 이들에게 무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식량이 충분한 애굽은 주변 지역에 지하자원도 많았기 때문에 무역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하였던 것은 대부분 애굽에서도 나지 않는 목재 혹은 진귀한 보석이나 동물 등이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무역을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전혀 없는 메소포타미아는 무역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옥한 충적토에서 많이 생산되는 식량과 대추야자 등이 주요 수출품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수입에 의존하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에선 이미 고대부터 무역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자연스럽게 중요한 무역로에 하란 같은 도시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목재가 나지 않았던 애굽과 메소포타미아가 공통적으로 노렸던 곳은 바로 페니키아 지역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백향목을 공급받았던 곳인 시돈과 두로는 두 왕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목재 공급지였습니다.

이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애굽은 왕국 초기부터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나중에 메소포타미아가 강국이 되었을 때 이곳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메소포타미아는 자원을 ‘무역’을 통하여 확보하는 것보다 ‘정복’을 통하여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하면 부가 국외로 유출되지만, 반대로 주변 국가를 점령하면 그곳에 있는 모든 부가 내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는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강력한 제국주의 정책을 펼치고자 하였습니다.

만일 메소포타미아에 강력한 왕국이 형성되면 이는 곧 주변 국가들의 불행이었고, 반대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혼란스러우면 이는 곧 주변 국가들의 행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가장 부흥하였던 시기인 다윗과 솔로몬 재위 시기가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암흑기(B.C. 1,200-900)’라 불리는 시대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유브라데 강부터 애굽 강까지 많은 조공을 받으면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앗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득세하던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고통을 당하는 암울한 시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이들에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각각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구약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승달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는 예후.
2. 적자생존의 도시국가 숙명

드넓은 충적토 평야에 자리잡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매우 독특한 도시국가 형태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처음부터 적은 단위의 인구 거주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미줄 같은 수로를 파서 유프라데강과 티그리스강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은 인구 수로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는 수로 작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으로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문명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늪지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로와 수렵 생활을 하면서 시작된 수메르 문명은 점점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냥감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런 생활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며,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강 상류로부터 전해진 농사법이 이곳 환경에 맞는 새로운 경작법으로 개발되면서, 집단 농업체제가 꽃을 피우게 됩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노동력을 합하여 거대한 수로를 파서 농사를 짓게 되면 ‘먹고 사는 문제’가 훨씬 쉽게 해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수로를 이용한 집단 농업이 성공을 거두게 되자 수메르 최초의 도시인 에리두(Eridu)가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도시가 성장하자 새로운 종교 제도가 생겨났고, 문자가 발명되었습니다. 또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고 노동의 분화에 따라 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이처럼 도시가 복잡하게 발전되자 자연스럽게 기존 체제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들은 무리를 지어 강 상류 쪽으로 올라가면서 새로운 도시국가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을 따라 건설된 도시들은 점점 그 숫자를 더하여 갔으며, 도시에는 수로를 통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늘 먹을 것과 일자리가 넘쳐났습니다.

따라서 유목 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더 나은 삶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는 늘 새로운 것으로 차고 넘치는 활기찬 곳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여유가 넘치는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된 삶이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지만, 경쟁에서 진 사람은 낮은 지위에서 남을 섬겨야 했습니다.

따라서 도시에서는 빈부의 차이가 크게 벌어졌고 또 신분의 차이가 생겨나 현대 도시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인근 도시와의 충돌이었습니다. 좋은 땅과 많은 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도시국가들 사이에서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였는데, 이는 도시국가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시들이 점점 팽창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웃 도시와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도시들이 거리를 두고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뜨거운 태양으로 인하여 농토의 소금화가 계속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로도 계속 확장시켜 나가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목초지가 부족하였는데, 양들이 풀을 다 뜯어먹으면 그곳에는 비가 오지 않는 관계로 다시 풀이 자라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양들을 데리고 풀이 있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여야 했고, 이는 결국 이웃 도시와의 충돌로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도시간 충돌은 각 도시의 운명을 건 전쟁이었으며, 내 가족이 살고 내 도시가 살기 위해서는 이웃 도시를 잔인하게 처부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승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후환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적에 대한 잔인한 살상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런 파괴적인 전쟁은 메소포타미아 도시 문명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메르 제왕 목록’에 보면 도시 국가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이 나오는데, 각 도시간 패권을 잡기 위한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도시간에 벌어진 생존 경쟁은 전쟁으로 귀결되었고, 이 전쟁은 각 도시가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각색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본질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땅과 물을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도시간 치열한 생존 경쟁의 환경 속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자비’를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잘못 베풀어진 자비는 곧 자신의 멸망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하여 각종 제도와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도시 문명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

구약 문화 배경사 류관석
▲류관석 교수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오역이 나오고 성경의 내용에 공감하는 정도가 약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