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주의 이원론에 기초한 이단 교리 신봉
물질 악한 것으로 여기고, 성경 우화적 해석
성적 표현조차 금지한 엄격한 금욕주의자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카타리파 핍박 위해

카타리파 부시코 마스터 카르카손
▲부시코 마스터(Boucicaut Master)가 1405년 그린 ‘1209년 카르카손에서 추방되고 있는 카타리 신자들’.
3. 카타리파와 이원론

왈도와 왈도파 신앙운동은 이단 카타리파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 ‘용사들의 시대’는 비평적 사고를 자극했다. 새로운 목소리를 높이고, 옛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로셀린, 피터 아벨라르, 브레시아의 아놀드와 같은 지식인들은 로마인들을 선동하여 교황권에 대항하게 했다. 샹파뉴의 농민 뢰타르는 베르튀의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비정통적인 ‘복음’을 설교했다. 이탈리아의 몽포르트 지역과 밀라노에서는 도시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된 새로운 이단이 등장했다.

아벨라르의 제자인 브레시아의 아놀드와 그 추종자들이 벌인 신앙운동은 특별하다. 이탈리아 북부 지방은 유럽 내륙에 견주어 봉건화가 늦게 이루어졌다. 이 지역 시민들은 봉건 영주에 대항하여 특별한 권리를 주장했다.

아놀드는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토지소유를 반대했다. 토지를 소유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부와 권력으로 구성된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은 이러한 거짓 교회로부터 성례를 받지 않아야 한다.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선량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놀드는 프랑스 전역으로 다니면서 자신의 비판적 생각을 널리 보급했다. 로마로 돌아와서 교황에 대항하는 반란에 참여했다. 그의 투쟁은 40년 동안 계속되었다. 1155년에 체포되어 이단자로 정죄되고 화형 당했다.

프랑스 남부 알비젠스 지방에는 카타리파가 번성했다. 카타리파의 교리는 마니교 신념과 비슷하다. 카타리파는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토대를 둔 이단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다.

먼저 등장한 바울당원주의(Paulicians)와 불가리아에서 유행한 보고밀주의(Bogomiles)와도 비슷하다. 페르시아 지역에서 성행한 이단 사상이 육로를 따라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중부 유럽으로 광범위하게 흘러든 것으로 보인다.

카타리파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이원론 사상에 따라, 물질을 악한 것으로 여겼다. 지상 세계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은 악신(惡神)의 작품이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영원한 힘과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양자는 모두 시간을 초월하므로 어느 한 쪽도 다른 것에 비해 우선적이지 않다. 어느 한쪽이 물리적인 힘이나 정복에 의해 기울어지지 않는다. 우월한 생명의 질에 따라 결정된다. 선을 택하는 것이 선하게 되는 길이다.

구원은 육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다. 세상은 선과 악이 혼합된 상태이다. 이 상태는 악이 가져다주었다. 정경은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예언서 일부분이다.

성경은 우화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유령의 몸을 가진 천사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부활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카타리파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로마교회는 신약성경의 우화적 해석을 거절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잘못을 범하는 악하고 부패한 집단이다. 성례, 지옥, 연옥, 몸의 부활 교리는 그릇된 가르침이다.

카타리파는 성적인 표현을 삼갔다. 이성 간의 육체적 접촉을 피하려고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배우자가 그 시체에 손을 대는 것조차 거부했다.

결혼을 금하고, 육류, 우유, 계란, 버터, 치즈 등 동물들의 소산들을 멀리했다. 이는 성적인 관계를 거쳐 생성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채식을 했다. 생선은 먹었다. 물고기가 성적인 관계를 통하지 않고 번식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는 엄격한 금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깊은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영적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철저한 윤리생활과 엄격한 자기부정의 삶을 유지했다. 그들의 거룩한 삶과 성결성은 수도사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카타리파는 신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했다. 카타리파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완전자와 아직 진리를 배우는 상태의 보통 신자로 이원화했다. 계율과 가르침이 다수 신자들에게 너무 엄격하다는 불평에 대한 조치였다.

완전자는 머리에 손을 얻고 ‘성령세례’를 받았다. 완전자는 도덕적 규율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보통 신자는 죽음에 임박한 경우에만 완전자가 지키는 계율을 지켜도 무방하다고 했다.

카타리파의 세력이 강해지고 번창하자, 여러 가지 악의적인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결혼생활을 하지 않으나 함께 모여 등불을 끄고 집단 난교를 행하고, 썩은 고기를 태운 것을 성찬식에 사용하며, 이것을 먹으면 정신을 잃게 된다는 루머가 횡행했다.

카타리파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가졌다. ‘완전자들’ 조직이 감독과 사제를 뽑았다. 전통적 교회 의식이 아닌, 새로운 종교 의식을 가졌다. 성찬식은 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주기도문을 크게 낭송하는 동안 빵을 나누는 방식으로 시행했다.

카타리파는 로마교회를 거부했다. 교회 출석과 세례가 국민의 의무사항이던 시대에 살면서도,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들은 기존 체제를 약화시키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로마교회를 악의 집단으로 여기고서 세속권력과 봉건사회, 그리고 그 권력과 사회를 지도하는 교황청에 맞서 투쟁했다. 카타리파는 12세기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가까이 오스트리아와 독일과 멀리 영국에도 퍼졌다.

이 와중에 왈도와 왈도파 신앙 운동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교회는 신종 이단들의 세력이 커지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단자들을 정죄했다. 교회가 규정하는 공식 교리를 불신하며, 교회제도를 파괴하며,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왈도와 추종자들이 교회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지 못하고 극심한 수난을 당한 까닭은, 교회가 그들을 이단 카타리파와 동일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교황 인노센트 3세는 카타리파 처형에 열성을 다했다. 십자군을 동원하여 그들을 정벌했다. 그의 노력은 지나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단박멸 과정에서 죄인,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 무죄한 자를 가리지 않았다. 대량 살육을 감행했다.

교회는 기존 체제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는 모든 새로운 신앙운동과 사상에 과잉반응을 보였다. 이단에 대한 과잉 징벌은 인노센트의 치세가 끝난 뒤에도 12년 동안 계속되었다.

카타리파가 번성하던 지역의 알비젠스인들은 왈도파 운동과 카타리파와 같은 맥락에서 희생을 당했다. 카타르인이 왈도파로 개종되어 수용된 경우도 없지 않다.

왈도파 사람들의 지속적인 전도와 가르침으로 많은 알비젠스인들이 이원론을 버리고 성경적 신앙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위그노파 후손들인 18-19세기 프랑스 개혁교회가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신앙의 선조로 수용한다고 한다.

카타리파 카타리 화형
▲종교재판으로 카타리파 신자들에게 화형을 집행하고 있는 그림.
4. 종교재판의 덫

중세기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카타리파를 징치(懲治)하고 축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였다.

교황은 이단을 제거하고 정통신앙을 수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교구마다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세속 군주들은 교회 회의의 결정에 따라 무력을 사용하여 이단자들을 처단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는 세속군주들로 하여금 무력을 동원하여 이단자들을 탄압하도록 결정했다.

교회의 종교재판법은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제정(1184)했다. 모든 교구가 최소한 한 해에 한 번 이상 교인들을 조사하여 위험한 사상을 가진 자를 색출하게 했다. 정통신앙 고백을 의무화한 것이다. 이단자를 보호하는 사람은 불고지죄(不告知罪)의 책임을 물어 이단자와 동일한 처벌을 받게 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는 이단자 진멸을 결정했다. 모든 수도사들도 감독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도록 했다. 그 무렵, 로마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교회의 권력을 인정하고, 통제를 받아들이며, 교황의 정책을 영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도 수용함을 의미했다.

성직주의와 교황권력에 항거하는 사람은 교인이 될 수 없었다. 로마교회의 교인이 아니고서는 그 사회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서방교회는 이단자를 징벌하려고 십자군을 일으켰다.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간 십자군이 이교도들을 진멸한 것처럼, 새로운 발상을 하고 새로운 신앙형태를 가진 자국 백성들을 징치했다. 그들을 교수형, 화형에 처하거나, 팔다리를 찢었다. 불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다.

교회는 새로운 사상의 씨까지도 말리려고 했다. 수도사 버나드는 이단색출 정책을 강경하게 지지했다. 그러나 이단자 처형의 잔인무도함을 보고 “이단자들은 칼이 아니라 설복(說服)으로 개종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의 이단 징치 과정에서 나타난 잔혹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말해 준다.

교회의 이단박멸 시도는 강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교회는 영혼의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자신의 그릇된 제도와 실천을 개혁하지 않고, 구조적 모순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교권과 힘으로 이단을 징치하려 했다. 선량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단박멸 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카타리파로 개종했다.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며 맑은 물을 찾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교회는 영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당시 교회는 살인집단이었다. 교회 자체의 모순과 이단의 급속한 확산은 교황이 통치하는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왜 교회의 이단처벌은 그토록 잔인했는가? 기독인들의 잔혹성은 도를 넘었다. 교회는 교회개혁과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타깃이 필요했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흑사병마저 창궐하고 대중의 불안감이 증폭되자,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은 손쉬운 대중 통제 방법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사상을 말하는 남자나 이상하게 보이는 여자를 모조리 잡아다 고문했다.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확실한 증거나 근거도 없이, 개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성토했다. 사람들을 잔인하게 징치했다.

맺음말: 기득권, 힘의 논리

왈도는 창의적으로 사도 시대의 기독교를 복원하는 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자기 시대의 필요를 채운 ‘위대한 이단자’였다. 복음 진리를 간파했고, 사도들처럼 소박한 삶을 살면서 이웃에게 헌신했다.

왈도의 성경 사랑과 사도적 교회 회복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시원(始原)이다. 왈도파와 카타리파의 기원과 교리는 다르다. 전자는 역사적 기독교의 후예다. 후자는 플라톤주의 이원론 사상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접목시킨 이단이다.

중세 후기 로마교회는 어리석었다. 정통과 이단 두 그룹을 하나의 목록에 함께 올렸다. 진짜 이단과 가짜 이단을 구분하지 못했다.

제도화되고 변질된 교회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소중한 보석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영적 어두움에 빠진 성직자들은 보석과 돌덩이들을 싸잡아 이단으로 정죄했다.

교회는 상을 주어야 할 자에게 벌을 주었다. 다수의 횡포에 맞서는 소수 정통신앙 그룹을 분리주의 집단으로 매도했다. 정통과 이단은 기득권과 힘의 논리로 결정되었다.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