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칼빈주의 저항권 이론

칼빈주의 저항이론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담겨져 있는 통곡이자,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기본적으로 잘못된 왕권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성경적 이해가 제시된 곳은 바로 『제네바 성경』의 각주와 해설에서였다. 수없이 많은 피를 흘린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제네바 성경에서 지적된 해설들을 따라서, 합당한 왕의 명령이 아니면 거부할 수 있음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저항 설교의 한 부분은 이세벨의 악행에 대해서 징치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당대에 내려져서,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성경말씀이었다.

16세기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로마 교황의 권위가 빛을 잃자, “왕권신수설” (Divine Right of Kings)을 통해서 절대주의 시대에 왕권의 무제한적인 통치권을 주장한 이론이다. 그 바탕에는 교회에 관해서도 “수위권”(Royal Supremacy)을 주장하는 왕들의 횡포가 극에 달했으니 심지어 영적인 최고권세로까지 스스로 올라가서 정죄하고 심판을 내렸다. 엘리자베스, 제임스 1세, 챨스 1세 등은 한결 같이 왕은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메리 여왕 시대에 유럽 대륙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왕권신수설을 비판한 존 포넷 (1514–1556), 크리스토퍼 굳맨 (1520-1603), 그리고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낙스(1514-1572)에 의해서 저항권이 널리 전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후, 잉글랜드 교회의 신학과 예식은 성공회라는 국가교회 체제로 정착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유럽의 개신교회를 채택하지도 않았던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Elizabethan Religious Settlement)은 “1559년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통일령 (Act of Uniformity, 1559)을 강화하게 되자,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교회를 세울 수 없었고, 단지 칼빈주의 신학과 정신으로 활동을 도모할 수 밖에 없었다.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로 이어지는 스튜어트 왕조에서 왕권신수설은 한층 강화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이던 토마스 카트라잍은 한편으로는 군주제도를 옹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장로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분투노력했지만, 결코 순탄치 못한 삶으로 고난을 감당해내야만 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교성경』 (1568)을 사용하도록 강조했고, 제임스 1세는 “흠정역”을 새롭게 내놓았는데, 세부적인 정치적인 견해는 『제네바 성경』 의 해설과는 달랐다.

죠지 부캐년(1506-1582)은 생애의 대부분을 학업과 교수, 투옥과 도망자 생활 등으로 점철하였다. 낙스의 종교개혁이 정착되자 1560년경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왕궁에서 어린 제임스 6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후에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양쪽 다 다스렸다. 부캐년은 1566년에 공개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의 학장이 되었으며, 평신도로서 총회의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부캐년은 어린 제임스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바꿔보려고 노력했고,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는 군주가 되어서 왕권의 제한성을 인정하도록 변화시키고자 했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담긴 저서가, 『스코틀랜드 안에서 군왕의 권리』이다.

부캐년은 시민들의 저항권 이론을 제시하여 스코틀랜드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부캐년의 정치적 주장들은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기나긴 박해 속에서도 왕에게 저항하다가, 찰스 1세의 동생 제임스 7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제지하고자 1689년에 파면시키고, 명예혁명을 성취하였다. 부캐년의 핵심적인 정치사상은 모든 정치적 권세의 원천은 시민들이라는 점이다. 왕권은 제한적인 것이고, 조건적인 권세를 받는 것이기에, 왕이 시민들을 종교적인 이유로 처벌하고 학정을 가한다면 저항을 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다. 부캐년의 책은 1584년에 의회의 결의로 정죄를 받았고, 1664년에 찰스 2세에 의해서 정죄 당했으며, 1683년에는 제임스 7세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책을 불태웠다.

프랑스 왕들의 횡포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탄압도 잉글랜드의 사례들과 같았다. 프랑스 종교전쟁이 진행되면서, 강물같이 많은 피를 흘린 위그노들의 저항이 한층 강화되었다. 1572년 8월 23일, 바돌로뮤의 날 밤에 약 5만여 명의 개신교회 성도들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자, 프랑스 개혁교회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저항권에 대해서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오도르 베자 (1519-1605)는 칼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저항권을 옹호하는 글 (Du droit des magistrats sur leur subiets, 1574)을 발표했다.

네델란드에서도 스페인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를 옹호하는 글을 알투시우스 (1557-1638)가 발표하였다. 그는 칼빈주의 정치사상가로서 독일의 법조인이었다. 1609년에 스페인에게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지도자들하고 투쟁을 지속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은 개혁교회의 정착을 위해서 국가를 장악하고 있던 각 지방 귀족들과도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항구도시 엠덴은 네델란드 상인들만이 아니라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서 잉글랜드와 신성로마제국의 이해가 충돌하는 요충지였는데, 독일 루터파 군주들도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들은 강력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1571년과 1610년에 두 차례 개신교회의 총회가 엠덴에서 개최되었으며, 화란 개혁교회의 심장부이자, “북부의 제네바”로서 지켜나갔다.

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전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