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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무엘상 28장 3-7절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아무에게도 도움이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면초가는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민심이 흉흉하던 진나라 말에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영웅들이 서로 싸우며 패권을 다툰 끝에 항우와 유방이 양대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초나라의 항우는 한나라의 유방과의 싸움에서 점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항우는 결국 유방에게 휴전을 제한했고 유방은 이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휴전을 맺고 항우는 두 달 후에 초나라 도읍인 팽성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휴전 약속을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항우는 해하라는 곳에서 한나라의 명장인 한신에게 포위를 당하게 됩니다. 포위를 빠져나갈 길은 없고 식량은 바닥을 보이는 상황에서 한나라의 군대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고향을 그리는 구슬픈 초나라의 노래가 사방에서 들려오게 됩니다. 한나라가 항복한 초나라 병사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었습니다.

초나라 병사들은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듣자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렸고 도망자가 속출했습니다. 초나라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항우도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람이 포기하는 이유

사람이 살다 보면 사면초가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면초가 앞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환경 자체가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환경 때문에 어쩔 수없이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포사다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나 일이 안 풀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리고 꿈을 포기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만든다. 하지만 모두 변명 일뿐이다. 사람들이 포기하는 진짜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 분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됩니다. 저 자신을 봐도 포기하는 이유를 보면 포기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도전을 했습니다.

도전은 했는데 해보니까 너무 힘이 듭니다. 힘이 드니까 편하기 위해서 도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을 헤쳐 나가려고 하니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래서 환경을 핑계 삼아 편하기 위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은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진짜 아니다’ 싶은 것은 빨리 포기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포기도 중단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동굴과 터널의 차이

동굴과 터널의 큰 차이는 “출구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동굴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없습니다. 반면에 터널은 입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출구도 있습니다.

터널은 아무리 길어도 출구가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일지라도 한 발 한 발 계속 앞으로 끝까지 전진하기만 하면 반드시 출구가 나타납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통과하는 고트하르트 바시스 터널이라고 합니다. 터널 길이가 장장 57.09km입니다.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터널의 길이입니다. 중요한 것은 57km나 되는 터널이라도,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터널을 지날 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터널을 지날 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어두운 터널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출구가 나온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57km나 되는 긴 터널을 통과하는 운전자는 출구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긴 터널 안에 있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터널이라면 통과해야 합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힘든 터널이라도 반드시 출구가 있기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끝까지 가야 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사무엘이 죽고 난 이후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쳐들어왔습니다.

이 때 사울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사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자 사울이 선택한 것은 신접한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어야 했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왕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계획합니다.

우리도 때론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가운데서 하나님께 떼도 써보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

하나님의 침묵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기에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막스 피카라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침묵이란 결코 수동적 표현 방식이 아니라,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포기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비록 침묵하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환경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해주시느냐”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옛말에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신중하게 결정하고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끝까지 가보지 않으면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저는 아직도 2002년 한일 월드컵 중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8강전을 치룰 때가 잊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때 아이들과 함께 8강전을 두류공원 야외공연장에 가서 같이 관전을 했습니다. 0:0 상황에서 한국이 페널티킥을 얻어냈습니다. 키커가 안정환 선수였는데 그만 골을 넣지 못했습니다. 페널티킥 실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비에리 선수가 코너킥 찬스에서 헤딩골을 넣어 이탈리아가 1:0으로 앞서갑니다.

이제 후반전이 거의 끝나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졌다 싶어서 아이들과 함께 집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두류야외공원이 난리가 났습니다. 설기현 선수가 동점골을 터뜨린 것입니다. 후반 44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장전까지 가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 선수가 헤딩으로 골을 넣으면서 우리나라는 8강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끝까지 가는 것이다

끝까지 믿음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믿을 때 하나님도 우리를 끝까지 믿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믿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끝까지 믿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무기력입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헤쳐 나갈 힘도 없고, 끝까지 견뎌낼 힘도 없습니다.

결국 누가 이런 청소년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까? 부모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가정마다 아이들이 하나 둘 밖에 없으니, 부모들이 그들의 필요를 다 채워줍니다.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으니 삶에 대한 맷집도 없고 삶의 어려움을 인내할 만한 힘 자체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청소년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코로나19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험대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나라와 언론에서 코로나19의 재확산이 교회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더더욱 교회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된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님은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수가 줄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수가 줄어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줄이시면 줄어들어야 합니다. 가짜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정리하고 계십니다. 가짜 교회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문을 닫아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고 믿는 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정답이라고 확신한다면 끝까지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줄만큼은 끊어지면 안 된다

이탈리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가 청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주 도중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그 순간 청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청중들은 그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숨죽여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또 한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이번에는 세 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끊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잠시 동안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청중들은 파가니니 이제 연주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멈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을 한 손으로 높이 들고는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기술과 뛰어난 솜씨로 마지막 남은 한 줄을 이용하여 곡을 완전하게 연주하였습니다. 그 순간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인생에 있어, 때로는 이와 같이 줄이 계속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물질의 줄이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관계의 줄도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줄이 끓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줄만 끊어지면 않으면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데도, 아직까지 출구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다른 길을 찾으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인내해 보십시오. 견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카멜레온이 아니라 소와 같은 사람이 되라

카멜레온은 피부색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도마뱀입니다. 카멜레온은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피부색을 바꿉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색깔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원하는 사람은 카멜레온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분위기에 따라 환경에 따라 그것에 맞추어 색깔을 변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카멜레온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직한 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소를 50년 동안 그린 우리나라 동양화의 거장인 우촌 최태문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는 일생동안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떠날 때조차도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고 갑니다. 이제는 소를 닮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우직하게 소처럼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조금을 더디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승리의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돌이키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사울이 하나님께 물어도 침묵하시자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이 신접한 여인은 3절 말씀에 보면 사울이 사무엘이 죽었을 때 쫓아냈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하나님 대신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이유로,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문제를 해결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른 곳에서 길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되새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 중 가장 악한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이 아합왕이 이세벨의 도움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아합과 이세벨에게 보내어서 저주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합왕은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 21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같은 악한 왕이라도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였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사울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끝까지 가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십자가를 앞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이 잔을 옮겨 달라고 한 기도에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현장에서도 변화산에서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데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아셨기에, 믿음으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갔다면 우리도 가야 합니다.

무게중심을 잡아라

우리가 믿음으로 끝까지 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게 중심을 바로잡을 때,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오뚝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무게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미국 NBA농구계 전설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 스탁턴입니다. 존 스탁턴은 미국 N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 중 한 사람으로, 공을 가장 잘 뺏는 명가드로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하루는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남의 공을 그렇게 잘 가로챕니까?” 그 때 존 스탁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상대편 선수의 몸을 보지 않고 무게 중심을 봅니다. 왜냐하면 상대 선수는 반드시 그의 무게 중심을 따라 몸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 가면 피사의 사탑이 있습니다. 피사의 사탑은 처음부터 기울지게 만든 사탑이 아닙니다.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인해 피사의 사탑에 점점 기울어짐이 발생되었고, 이탈리아 정부는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해 10년 동안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현재는 기울어짐이 5.5도에서 멈춘 상태입니다.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졌음에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게중심을 잘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무게중심이 무너지면 한 순간에 허물어질 것입니다. 무게중심을 잡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무게중심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게중심만 바로 잡고 있으면 흔들릴 수는 있어도, 어떤 풍파가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한 무게중심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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