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4. 피어선과 변증

피어선은 정통 조직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탁월한 변증가로서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변증가로서의 모습은 주로 「오류없는 증거들」(Many Infallible Proofs: Chapters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 1886)에 나타난다. 주로 위대한 불가지론자라 불렸던 잉거솔(Robert Ingersoll)에 대한 논박으로 시작된 이 책에서 그는 증거의 중요성과 필요성 그리고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피어선의 이런 변증가로서의 모습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언(prophecy)

피어선은 기독교의 증거가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내적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과 가르치는 교리와 도덕성을 내포한다.

외적증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언과 기적이다. 예언은 말로 표현되는 기적을 말한다. 예언과 섭리는 쌍둥이 자매이다. 피어선은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기적을 반대하는 것에 맞선다. 기적의 반대는 곧 예언의 반대가 된다. 성경의 기적의 책이 아닌가. 기적이 부정되면 예언이 부정되는 것이요 기독교가 부정된다. 이것이 그가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못한 이유이다.

그는 진정한 예언의 기준으로 첫째 인간적 예견이나 지혜나 총명으로 추측할 수 없는 미래의 드러냄, 둘째 예언이 만일이라는 것을 제거해야 함, 셋째 예언의 시간적 종합적 증거가 일치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증거의 시냇물이 강과 합쳐지고 거대한 홍수를 이루듯 거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의 흩어짐을 예수님 당시 누가 과연 담대히 명료하게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이 하나만 보더라도 성경은 범상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권위는 하나의 예언이 모든 예언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관점은 반 틸(C. Van Til)의 ‘전제에 의한 이론’(the reasoning by presupposition)과도 유사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지식이 있음을 웅변적으로 알려준다.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해야 한다. 성경 예언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우 이신론자에 머물게 된다. 성경은 우리가 기독교를 변증할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다같이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에 호소하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법칙’을 진정으로 ‘사실’과 ‘법칙’이 되게 하는 궁극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따져 변론하게 하는 표준이 된다.

2) 기적

기적(奇蹟)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신약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와 ‘표적’ 세 용어는 경우에 따라서 함께 쓰일 때도 있는 데(행 2:22; 살후 2:9; 히 2:4) 이 용어들은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다. 즉 구원적 신론에서 이적은 필연적 귀결이다. 창조, 섭리, 죄, 구원의 원리를 인정할 때 구원은 진실한 필요물, 즉 은총으로서의 이적이 된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양하다.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의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은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자 복음주의 신학자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피어선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본 흄(D. Hume)이나 스트라우스(Strauss)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적으로서 기적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기적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은 기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태양이나 무지개를 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힘 모두를 초월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기적이라 인정한다. 정해진 자연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작용을 경이롭다고 하나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헨리 모리스는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이 성경 창조의 기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당연히 성경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확고한 창조 신앙의 피어선이 살아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 것은 당연하였다. 피어선은 변증에 있어 과학과 기적 둘 다 당연히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3) 성경 자증의 원리(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사용

피어선에게 있어 성경은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피어선이 볼 때 교리나 실천 상의 오류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시험해보면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의 핵심 도구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서 한 본문이 다른 본문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게 하던가, 다른 본문의 올바른 느낌을 확증해 주든가, 새로운 각도에서 그 의미를 조명해 주고 그 깊이를 열어 주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이 같은 피어선의 입장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의 모토로 시작된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굳건히 뿌리 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증학도 당연히 신학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원리, 즉 성경 자증의 원리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유추적 체계의 원리를 사용해야 한다. 성경적 변증은 불신자와 신자 사이의 단순한 '공통적 관념'(롬 1:20)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데서 말미암는 차원의 '공통적 관념'(요 1:1-12)에 호소해야만 한다.

4) 성경과 과학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이 말을 지금부터 110여년 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즉 과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적이며 실제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또한 오늘날 과학은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떠나 높이 평가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이든 과학적인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서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성경은 창조의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더욱이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bereshith)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피어선은 잘 알았다. 것이다. 또한 피어선은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어선은 과학에도 대단히 해박한 학자였다. 피어선이 활동하던 시기는 진화론과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관심은 당대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피어선의 관심 영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어선이 과학적 변증서를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어선은 자신의 책에서 자연과 성경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는 주장 뿐 아니라 오늘날 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주장을 편다. 피어선은 또한 창세기의 날(yom)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었다고 논증한다. 피어선이 볼 때에 창세기 2:4절에서 이 말은 창조의 전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시 95: 8절에 보면 “시험하는 때에” 란 말씀에서 그 날(‘욤’)은 40년을 의미한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피어선은 이 “날”은 하나의 시기를 의미했을 것이며 히브리어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의미 한다고 하였다.

피어선이 볼 때에 성서의 목적은 과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도덕적이며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언어가 과학적이었다면 그 언어는 관심을 끌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약점과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고 피어선은 역설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피어선은 과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자연의 영역 안에서 진화가 물리적 세계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 일 수 있다는 추측을 허용하고 있다.

5) 도덕적 권위

세상 철학에 있어 인간의 최고선은 자아 실현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로서 우주의 법칙에 순응해서 그의 내적 가능성을 계발한다. 기독교 철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상 안에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해야 하며 악한 자의 사역이 계속하는 한 절대적 최고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도적적 양심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 늘 무능할 뿐이다. 피어선이 볼 때 성경적 최고선은 개개인의 악과 내재적 악을 소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윤리는 소망의 윤리요 회복의 윤리이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책이 아니다. 성서의 통일성, 명확성 가운데 내재하는 도덕적 숭고함의 극치(sublimity)는 다른 종교와 차원 자체가 다르다. 피어선은 성서를 대적하는 것이 곧 도덕적 타락이라고 말한다. 피어선은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공격하게 내버려두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나 선하시며 모든 것을 알지만 자비로운 분이다. 세상 헬라의 처럼 신경질적이고 자기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다. 이게 인간의 본 본 모습이. 인간을 닮은 신이 아닌 신을 닮은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성서만이 인간의 존엄과 위엄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한다. 동물과 사람의 위치는 분명 다르다. 송아지를 숭배하고 악어를 숭배하는 것은 추락한 인간의 상징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동물의 창조를 고귀하게 여기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모든 피조물의 왕관이 주어졌다, 자연철학, 천문학, 지질학, 소설, 역사, 법과 의학은 지식은 주나 육욕을 억제하고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며 고상한 목적을 고취하고 죄의 기질을 드러내며 더 진실한 아들이 되게 만들고 더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성경의 도덕적 권위는 성경이 다른 종교 문헌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을 증거한다. 피어선은 이점을 강조한다, ‘사람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의를 위하여 역사하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며 악은 억제 되며 선(善)을 자극’한다.

6)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

피어선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피어선은 총 6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주(Lord) 되심을 변증한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요, 둘째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독특하고 신비로운 측면을 다루고 셋째 신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역사적 실재로 나타날 수 있었는가를 다루면서 이 당혹스러운 주제에 대해 변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2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능력과 독창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구속사적 설교에서 잘 나타나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direct prophecy)이 소위 ‘원복음’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3장 15절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예언자의 시대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에게서 절정을 이루며 말라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논증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과 역량이 풍부했던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보다 오히려 간접적 예언(indirect prophecy)들이 보다 더 놀라운 증거들이라고 본다. 예언적 시(詩)들과 모형론적 레위기의 의식과 규정들 그리고 역사책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형을 추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의 파라독스에서도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역설 가운데 바로 십자가에서 그 적나라한 절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니케아공의회 이후에 지속되고 있는 신학의 관심 영역이다. 제한된 우리 인간이 어찌 전지전능하신 참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피어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긍정하는 피어선은 이 문제를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은 선생(랍비)으로 묘사한다. 우리 인간은 믿음 뿐 아니라 배워야 한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불렀다. 피어선은 워드워즈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는 사유의 화신(Language is the Incarnation of thought)"이라고 하였다.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위와 거룩함과 고상함과 생명력과 독창성과 희생의 사랑은 세상 철학과 다른 참 진리요 참 철학이다. 과연 이 세상 누가 이분과 견줄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은 아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위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5. 나가면서

지금까지 피어선의 생애와 그의 학문적 여정과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피어선 변증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그의 변증에서 증거 된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더하여 신학, 문학, 예술, 철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독교와 성경과 그리스도를 증거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피어선이 살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은 성경과 기독교가 세상의 세속적 자연주의와 우연주의로부터 세찬 도전을 받던 시기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정통 조직신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놀라운 설득력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피어선의 증거들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변증이었다. 기독 학자로서 피어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순수하고도 고결한 영혼에서 나오는 확신에 찬 열정의 변호였다. 이것은 성경을 신뢰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 그것이 바로 그의 설득의 힘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다. 피어선의 변증은 단순히 성경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는 변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믿음에 대해 피어선기념연구원 원장을 지낸 평택대 유윤종 박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확신은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길만한 믿음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피어선은 열정의 선교사답게 오늘날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려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것인지 그 길을 변증의 방법으로도 비춰준 신앙의 등불이었다. <끝>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