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역사홍보위원회(위원장 강자현 장로)가 주최한 ‘한국장로교단 분열과 연합 50년 평가와 전망’ 포럼이 1일 총신대 양지캠퍼스 1백주년기념예배당에서 열렸다.

포럼은 ‘1959년 합동·통합 분열 과정과 요인’을 박용규 교수, ‘분열 후 합동교단의 회복과 합동·통합의 지난 50년간 성장 비교’를 안인섭 교수(이상 총신대 역사신학)가 각각 발표했다. 2일 대구 반야월교회(담임 이승희 목사)에서도 같은 형식의 포럼이 개최되는데, 여기서는 박용규 목사와 함께 장차남 증경총회장이 ‘한국 장로교의 미래와 전망’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다.

정훈택 총장대행은 포럼에 앞서 열린 예배에서 인사말을 통해 “최근 장로교단들을 중심으로 연합의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데,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개최 취지를 밝혔다. 강자현 위원장 사회로 드려진 예배에서는 최인모 목사(인천신광교회)가 ‘제사장 나라가 되어라(출 19:1-6)’를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용규 교수 “3천만환 때문에 분열된 것 아니다”

▲박용규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발표하던 도중 분열 당시인 제44회 총회장이었던 노진현 목사의 가족들이 갖고 있던 중요 기록들을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이대웅 기자
올해로 합동·통합 분열 50년을 맞은 가운데 분열 과정에 대해 발표한 박용규 교수는 통합소속 교회사가들이 당시 분열의 직접적인 동기를 당시 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 박사의 ‘3천만환 사건’이라고 하는 것에 적극 반박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소위 ‘3천만환 사건’의 전말은 박형룡 교장이 문교부 정식 대학인가를 위해 신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3천만환을 사기당했고, 이에 이사회는 박 교장에게 사임을 권고, 박 교장이 기꺼이 사직하며 마무리된 사건이다. 그는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WCC 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NAE 측을 공격하는 결정적 논거를 제공해 줬다”며 “그러나 그 이전부터 에큐메니칼 문제는 총회 내 최대 이슈로 계속 진행중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3천만환 사건이 이전부터 총회 안에 일고 있는 에큐메니칼측(WCC)과 반에큐메니칼측(NAE)의 대립으로 인한 총회 갈등을 가속화시킨 요인이기는 했지만, 분열의 1차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며 “당시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시대적 배경과 사료들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분석한다면 주된 요인은 WCC 문제로 압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WCC와 에큐메니칼 외에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그것도 자기들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던 것들”이라며 “역사 서술은 결코 자기 교단이나 자기가 서 있는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재구성돼서는 안 되고, 일차적인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는 마땅히 구분돼야 하며, 앞뒤가 바뀌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역사가 설정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돼서도 결코 안 된다”고도 덧붙였다.

또 1959년 당시 제44회 총회 정회 후 에큐메니칼 측 주도로 ‘연동총회’가 먼저 열리고 두 달 이후 승동교회에서 총회가 속회됐는데도 통합측 사료들이 합동(승동)이 먼저 총회를 열어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밝히는 것에 대해서도 “당시 총회장이었던 노진현 목사가 자신의 ‘진실과 증언’에서 밝힌 것처럼 분명한 역사 왜곡”이라고 설명했다.

안인섭 교수 “합동, 분열 10년 만에 2배 차이 뒤집어”

▲안인섭 교수는 “교회 연합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연합 주체들이 각자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분열 이후 50년을 평가한 안인섭 교수는 “합동과 통합의 분열은 합동측에 있어서는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처함을 의미했다”며 “통합측은 WCC와 연계돼 해외의 재정적 후원을 계속 확보할 수 있었지만, 합동측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학적 정체성 형성에 모든 것을 걸고 맨손으로 시작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교세나 신학교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합동측은 그러나 10년 만에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며 통합측을 앞서게 된다. 한국종교사회연구소가 펴낸 <한국 종교연감>에 따르면 분열 당시인 1959년 통합은 약 55만명이었고, 합동은 2년 후인 1961년 통계로도 28만 6천여명에 불과했다. 신학교 수에서도 통합은 일반대학교 1곳, 일반대학 4곳, 신학대학원 1곳, 신학대학 1곳, 신학교 6곳 등이 있었는 데 반해 합동은 신학대학 1곳과 신학교 3곳만 속해 있었다.

그러나 10년 후인 1969년 합동은 성도 수에서 통합을 뛰어넘는다. 교회 수는 합동 1991곳, 통합 2281곳 등으로 미치지 못했지만, 목사 수 2096명, 성도 수 55만여명으로 목사 수 1204명, 성도 수 46만여명의 통합을 넘어선 것. 안 교수는 이에 대해 “합동 목회자들이 10년간 얼마나 성실하게 목회하며 교회를 세워갔는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후 1974년 통합이 다시 성도 수에서 합동을 앞서기도 했지만, 1977년 합동은 이를 다시 뒤집고 성장을 계속해나갔다. 결론적으로 두 교단 모두 뚜렷한 성장세를 계속해서 나타내게 됐다. 안 교수는 “2천년대까지를 종합해서 살펴보면 합동의 인적 자원에 대한 성장이 두드러졌지만 그렇다고 통합의 성장이 약했다는 말은 아니다”며 “통합도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해 왔으며, 서로 성장의 격려와 도전이 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이어 양 교단의 신학적 발전 방향에 대해 역사적 칼빈주의 전통 위에서 칼빈을 수용한 합동은 △개혁주의와 개혁신학 △칼빈주의적 성경해석학 △칼빈과 칼빈주의 연구 확산 등을, 에큐메니즘에 기초해 칼빈을 수용한 통합은 △개신교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는 칼빈 해석 △복음주의적 칼빈해석 △칼빈에 대한 공동연구 시도 등의 특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칼빈 연구가 다양화·조직화·국제화됐다고도 덧붙였다.

안 교수는 통합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양 교단의 연합 움직임에 대해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구조적 차원에서 조급하게 이뤄진 교회연합 운동은 항상 더 큰 문제를 낳곤 했다”며 “따라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종교개혁 운동을 교회분열로 보지 않고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한 칼빈의 방법론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신학적 측면에서 일치하고 연합하는 일은 매우 어려우므로, 목회와 선교, 사회 복지, 남북 통일 등 한국교회 공동 과제를 함께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