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새가족반
▲이정규 목사는 “이 책이 ‘새신자반’이 아니라 ‘새가족반’인 이유는, 이 책이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으로 복음을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이 책은 삼위 하나님께서 역사 전체를 통해 인간을 사랑과 행복으로 이끄신 이야기입니다. ... 저는 힘을 다해, 제 생각에는 새가족들이 성경의 배경지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극한까지 기독교 신앙의 풍요로움과 영광스러움을 이 책에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야근하는 당신에게> 등을 쓴 이정규 목사(시광교회)가 <새가족반>을 발간했다. <새가족반>은 교회 개척 후 7년 동안 성도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새가족'들에게 개인 혹은 소그룹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묶었다. 삼위 하나님과 행복을 중심 키워드로 창조(가족으로의 초대)와 죄(거절), 구원(회복)과 신자의 삶(새로운 가족) 등 4부분으로 나눠 설명하면서, 12주 동안 교회 현장에서 새신자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저자는 신 존재 변증보다는 막연히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 모르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내용을 핵심으로 삼았다. 이 책의 집필은 "교회에 들어온 새가족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부요하고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고 자랑함으로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 대신, '쉽게 기초만 가르쳐 준다'는 명목 하에 기독교 신앙을 대충 가르치고 온갖 봉사와 윤리적 실천으로만 새가족들을 내몰아버리는 세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다음은 저자와의 일문일답.

새가족반
이정규 | 복있는사람 | 332쪽 | 14,000원

-각주 있는 '새가족반' 교재라니요.

"제 원래 글쓰기 방식이 그렇습니다(웃음). 무언가를 인용하면 출처를 밝혀야지요. 제가 글을 쓰더라도, 제 아이디어와 남의 아이디어를 구분해서 말하는 게 올바른 글쓰기 방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 책 중 각주가 없는 책은 없습니다. '쉬운 책'과 '각주'의 유무(有無)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 책이 쉽다고요?

"독자들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루는 범위가 쉽냐고 물으시면 그렇진 않습니다. 첫 장부터 '삼위일체'가 나오고, 중간에 구원과 죄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루는 범위를 쉽게 설명했느냐고 물으시면,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독특한 것은 새가족들도 부류가 있는데, 교회를 오래 다녔다가 옮겨서 처음 오신 분들은 오히려 어렵다고들 하십니다. 하지만 최근 전도하는 친구는 삼위일체 부분을 전혀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삼위일체 같은 부분이 '어려운 교리'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쉬운 건 아니지만, 나오면 지레 겁부터 먹는달까요.

그런데 책의 첫 장만 '삼위일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새가족반>에는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삼위일체가 나옵니다. 끝까지 가면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피드백도 '어렵다'가 대세는 아니었습니다. 통전적 이야기이고 드라마라고 한 것처럼, 어려운 교리를 쉽게 풀었다고들 하십니다."

◈“삼위일체는 이단 방지용 교리? '복음의 중심'”

-골격은 기존 '사영리'와 비슷한데요.

"제 신학은 사영리가 담고 있는 신학과 조금 다릅니다. 사영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것들이 가진 강점이 있고, 짧은 시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냈습니다.

제 책은 '믿음이 없는데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녀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불신자들이 다 같지 않습니다. 실제 전도하는 입장에서는 격렬하게 예수님 믿는 것을 반대해서 끌어줘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믿고 싶은데 뭘 알아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도 있으며, 오래 다녔지만 신앙의 기초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 새가족이 온다면, 대부분 이러한 부류입니다. 새신자인데 아무것도 모른다거나,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꽤 쉬었고 교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거나, 교회를 옮겨서 새롭게 등록했다거나, 세 가지입니다. 저는 세 부류를 다 노렸습니다. 첫째 부류라 해도 간단히 가르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시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부류는 교회에 적응돼 있을 뿐, 모르는 건 같습니다. 셋째 부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재정립해서 가르쳐 주면 교회 생활을 출발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이렇게 구성했는데, 독특하게도 첫째와 둘째 부류는 어려워하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배웁니다. 그런데 셋째 부류가 오히려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감동을 받으면 더 많이 받습니다. 대강 알았던 부분들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그동안 이단이 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교리였는데, 이것이 복음의 중심이 되어 움직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를 통해 복음을 배웠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신자들이 가장 받아들이거나 믿기 어려워하는 것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무엇인지요.

"오히려 '죄'였습니다. 삼위일체는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도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길 힘들어 했습니다. 원래 '죄'는 새가족반 운영시 한 차례 강의에 불과했으나, 설명해서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는 과정이 길어져서 세 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내가 죄인인 건 맞지만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내가 (죄값을 치르러) 지옥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이 대화의 주 소재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지난 7년간 새가족반을 직접 이끌었는데, 의외로 제가 많이 배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질문을 연구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옥에 가겠다'고 한 분에게는 뭐라고 답하셨나요.

"몇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기가 '내가 엄마 젖을 빨지 않고 자립하겠다'고 한다면 말이 되겠냐고 합니다. 설사 지옥을 가더라도, 우리의 죄가 보속(補贖)되는 게 아닙니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을 찾아가서 죽인다 해도 딸이 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서만 갚아질 수 있고, 십자가가 아니면 방법이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려면 죄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믿기 위해 '내가 죄를 처리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 교회에서는 죄를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까봐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이구나'를 깨달으면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죄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죄에 대해 통전적이고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받는 상처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기독교는 밀리미터(mm) 단위로 죄를 공격하는데, 너무 거친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저지르고 받는 상처는 성폭행이나 살인 같은 죄 때문이지만, 작은 교만, 작은 외식 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가 내게 선한 행동을 했더라도, 다른 의도가 끼어 있었음을 알게 되면 좋은 경험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죄는 단순히 우리의 어떤 잘못된 행동이라기보다, 그 이면의 잘못된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우리 인간 가운데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렇듯 우리 고통의 원인에 대해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를 청교도로 만들려는 것인지요.

"좋은 질문입니다. 두 가지로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청교도를 잘 모릅니다. '너 죄 지었으니 입 닫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청교도의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유롭고 행복했습니다. 그들이 죄에 대해 집요하게 공격한 것은, 우울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에 대해 깊이 이해하면, 일종의 통쾌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다스릴지 고민하게 하기도 하고요. 삼위일체에 대한 선입견처럼, 청교도를 나쁘게 생각하는 선입견을 먼저 벗어야 합니다.

둘째로 그 질문은 '우리를 너무 불행하고 우울하고 금욕주의적으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것과 같습니다. 이 책의 모든 장이 '행복'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의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가 바로 죄입니다. 그 죄를 내가 해결하려 든다면 우울하고 금욕적이고 어두운 삶을 살겠지만, 하나님께서 내 죄를 대신 해결해 주신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오히려 기쁘지 않을까요?

이 책의 목적은 '죄를 짓지 말라'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질문 많지만 대답해 주면 통쾌함 느껴”

-'행복'이란 주관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서로를 사랑하시면서 누리는 관계의 즐거움, 그 즐거움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을 이릅니다. 원래 그 관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셨지만, 인간은 그 즐거움으로부터 도망쳐서 다른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더 비참해졌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 하나님끼리만 누리시던 영원한 사랑과 행복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이정규 새가족반
▲<새가족반>에서 이정규 목사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그 분의 가족으로 살아가며 기뻐하시길 빈다”고 전했다. ⓒ이대웅 기자
-각종 지식으로 무장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리석은 복음'이 들어설 자리가 있던가요.

"복음이 어리석은 건 사실이지만, 지적이나 이성적으로 어리석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습니까. 지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초월한, 반(反)지성적이기보다 초(超)지성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 형제 자매들이 교회에 와서 겪는 일들을 보면, '자신이 굉장히 지적이라 생각하던 사람들이 사실은 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쾌감이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라고 믿지 못하겠다. 하나님 말씀에 오류가 없다는 것도 당연히 믿지 못하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책에 그렇게 나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먼저 그 책에 대해 비판하고 연구하고 과학적이거나 사실적이지 않다는 내용의 연구들이 풍부함을 말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로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을 인용하시면서 '모세가 말하기를'이라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간주하신 것인데, 그렇다면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님을 주장하고 싶을 경우 그 신학자가 예수님보다 뛰어난 신학자임을 먼저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태어나서 그런 질문 자체를 처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도 창세기를 모세의 저작으로 간주했으니, 누군가 모세오경 저자가 모세가 아님을 자신있게 주장하려면, 예수와 바울보다 뛰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자신 스스로 신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지요.

재미있는 건, 이를 반박하는 저뿐 아니라 질문한 본인도 통쾌해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었으니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믿음 없다'는 이야기만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20대가 지성적이고 똑똑하지 않느냐'는 것은, 제게도 포함되는 이야기이지만 '어중간하게' 똑똑합니다. 적당히 지성적일 뿐, 깊이 있게 지성적인 적이 없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는 창조와 진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과학이 정답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문제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신진화론을 정답이라 단언하기에는 우리의 배움이 너무 짧습니다. 그 안에도 굉장히 허점들이 많습니다. 과학적이든 신학적이든, 그런 문제들을 논의하려면 상당히 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로 '교리'를 설명하셨는데, '교리는 기독교만을 위해 있지만, 진리는 인간 전체를 위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먼저 '교리'를 뭐라고 정의하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교리에 대한 정의가 없다면,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쓰는 '교리'의 정의는 그 분이 말하는 것과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같다고 생각하고 공격합니다.

제가 쓰는 교리의 정의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뭔가 결론이 날 것이고, 그 결론은 '교리'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다 있을 것입니다. '교리는 나쁘다'는 말 자체가 이미 교리적 주장 아닙니까? 교리가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교리적(dogmatic) 주장을 한 것입니다. 마치 자신은 전제에서 벗어난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과 같습니다. '절대 진리는 없다'는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것 말입니다."

-새가족들에게 '강의'로 복음을 전하시지만, 그런 설명들보다 섬광 같은 깨달음 또는 기적과 같은 '계시'를 통해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경우도 있지요.

"둘을 배치시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기독교 교리를 차분히 강의하더라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목사님 말씀 전체에 동의하지만, 공감이 안 됩니다.' 이런 사람도 있지만, 뭔가 불 받고 방언 받고 성령 받아서 굳센 믿음이 생겼더라도 여전히 논리적으로 해결이 안 되고 십자가 죽음이 왜 나와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왜 가르쳐 주는지도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이성적·반성적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신비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굳이 갈라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강의해 봤자, 성령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헛것입니다. 또 그런 과정이 있더라도, 굳건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진리에 서지 않으면 쉽게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목회자,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직업”

-'신학책 덕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심방도 좋아하시지요.

"심방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목사가 신학을 하고 이론 신학을 실제에 접목시키려면, 자기가 대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심방도 공부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다 지식으로 쌓입니다. 내 양들을 아는 지식이 쌓인다고 할까요. 제가 이해하고 이론적으로 공부한 부분들이 그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그들을 먹이는 방식으로, 그들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심방은 그들을 위한 것이지만, 제게도 많은 공부가 됩니다.

일례로 토요일 저녁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본문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있어도, 어떻게 적용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풀리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담 전화가 올 때가 있습니다. 바쁘지만, '설교 준비 중이니 다음에 하자'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상담을 하고 나면 막혔던 설교가 확 풀리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심방과 상담이 이론 신학과 연결돼 결과를 낸 경험을 많이 했고, <새가족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제가 만난 수많은 새가족들과 나눈 이야기가 도움이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위해 수많은 전도를 실패했어야 했습니다. 실패한 경험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기억나는 경험은 홍대생 2명이었는데, 교회는 안 다니겠지만 성경은 배우고 싶다고 해서 홍대까지 매주 한 번씩 갔습니다. 밥을 사주면서요(웃음). 진짜 많은 질문을 했고 대답해줬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어느 날엔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책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됐습니다. 이 책에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말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고 들어야 하는지 공부가 됐습니다. 제게는 모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꿀팁'이 있으신지요.

"'젊은 사람들'이라는 카테고리를 버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카테고리로 그들을 모두 묶을 수 없습니다. 같은 나이대이지만, 모두 다양합니다. 50-60대에도 철 없는 사람이 있고, 20대이지만 50-60대 감성을 가진 경우가 있듯 말입니다.

하나의 원칙을 말하자면,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어떤 사람이든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건 힘들다는 것입니다. 우울하거나, 억압적이거나, 걱정과 근심이 있으면 만나기 싫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는데, 행복해하고 좋아하면 그 시간이 즐겁습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감수성이 그 문제에 있어 특히 심각합니다. 20-30대가 특히 공유하는 감성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스스로 살아가면서 행복하지 않으면, 제대로 사랑하면서 섬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회가 다른 일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직업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닌다면 더럽고 치사해도 일할 수 있고, 잘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더럽고 치사해도 심방을 가면, 독을 풀어놓게 됩니다. 하기 싫을 때 설교를 해도 독을 풉니다. 성도들을 향한 원망이나 미움, 섭섭함이 쌓이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좋은 목사가 된다는 것은 본인의 역량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그가 어떤 청중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봅니다. 좋은 청중은 좋은 목회자를 만들어 냅니다. 물론 좋은 목사가 아니라는 걸 교인 탓으로 돌릴 순 없겠지만요(웃음)."

새가족반
▲이정규 목사는 ‘새가족반’ 수준의 신자들이 읽으면 유익한 다른 도서들로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 등을 꼽았다. 삼위일체에 대한 책으로는 “저와 세부적으로 다소 의견이 다르지만 데럴 존슨의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장 좋고, 마이클 리브스의 <선하신 하나님>도 좋다”며 “삼위일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는 마냥 좋을 것 같은데, 상처도 있다고 책에 고백하셨습니다.

"저부터 죄인이니까요. 지나고 보니, 제가 지은 죄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교회의 문제들은 리더십을 가진 사람에서 시작됩니다. 저희 교회는 거의 100%입니다. 제가 저지른 죄이거나 제가 가진 문제점들이 교회에서 어려움의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은혜를 많이 누렸습니다. 많이 받아주고 서로 이해해 주면서요. 어려움도 고난도 있었지만, 인내하면서 오히려 신앙이 굳어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 못해 떠난 사람들도 있는데, 가슴 아프고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어떤 목회자로 기억되고 싶나'고 물었을 때 했던 대답(기억되지 않아도 좋다. 이 말이 진심이기를)이 울림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비전은 무엇인가요.

"비전이 없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드리자면, 그건 목회철학에 대한 질문과 비슷한데요. 하나의 반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내가 이런 목회철학을 갖고 있다'거나 '이런 비전이 있다'는 목회자들의 생각이 그 교회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고 성도들이 희생당하는 예를 오래 봐 왔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에서 요구되는 목사의 일을 잘 하는 것, 양떼를 잘 돌보고 말씀을 잘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교회를 같이 세워나갈 뿐입니다. 목회자가 특별한 비전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목회자야말로 어떤 특별한 비전을 가져선 안 되는 직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걸 목회철학이나 비전이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네요(웃음)."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설교단에 서서 자신이 느낀 감정을 '폭포수를 맞고 온 (푹 젖은) 내가 물을 튀기는 느낌'이라고 토로하신 적이 있습니다. 약간 자괴감을 토로하신 것이지요. 탈고하면서 느낀 감정이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삼위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란 너무 위대하고 영화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그 분을 우리도 함께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해낸 책이 너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뭔가 말씀드리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 글을 읽고서도 압도적인 사랑을 경험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