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
▲눈이 내린 루브르박물관 전경. ⓒStacy Wyss on Unsplash
상고방(Saint-Gobain)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상고방은 프랑스에서 사업을 시작해 유리 등 건축자재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글로벌 기업이다. 역사가 무려 350년이 넘는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 쓰인 거울을 공급했고, 루브르 박물관 마당의 유리 피라미드를 만든 기업이기도 하다.

나는 상고방의 주력 사업인 건축자재 사업부를 이끄는 수장에게 신규 비즈니스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수장은 그룹 부회장으로 전 세계에서 10조 원 이상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유리에 관해서는 달인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박식했다. 신규 사업은 전자산업에 사용되는 유리에 관한 것이었고, 나는 그 신규 사업의 책임자로 사업 계획을 보고한 것이었다. 일대일 미팅으로 2시간에 걸친 회의였다. 보통 사업 보고는 1시간이 잡히는데 2시간이 할애된 것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발표는 잘 진행되었다. 준비한 대로 착착 넘어갔다. 시장 분석, 고객 분석, 일정 관리, 시장 개발 전략까지 무난했다. 쉽게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다름 아닌 제품의 '가격'을 설명할 때였다. 가격 전략을 발표하자마자 잔잔하던 그의 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더니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원가는? 원가절감 계획은? 수익률은? 가격을 더 올릴 수는 없는가?

이런 걸 '멘붕'이라고 하던가. 늘 그렇듯이 예상 질문과 답안을 미리 준비했지만 질문 수준이 너무나 상세했다. 디테일!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형 계산기였다. 내 눈앞에서 원가 계산을 하나하나 해가면서 요모조모 따지고 설명했다. 계산기를 직접 두드려가면서 말이다. 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룹 부회장이라는 최고위 경영진이 소형 계산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원가를 직접 계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그때 일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로 충격이 컸다. 어떻게 회의를 마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말 한마디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가격이 모든 것이다(Price is everything)."

그날의 충격이 컸기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물론 나도 제품 가격이 사업 수익률에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경영컨설팅회사인 매킨지가 가격, 변동비, 판매량, 고정비를 각각 1퍼센트씩 개선했을 때 영업 이익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조사한 적이 있다. 단연 가격이 최고였다. 가격을 1퍼센트 인상하면 영업 이익이 무려 12.3퍼센트 올랐고, 1퍼센트의 변동비 개선은 8.7퍼센트의 영업 이익 향상을 가져왔다. 판매량과 고정비를 1퍼센트 개선할 경우 영업 이익은 약 3퍼센트 나아지는 데 그쳤다.

하지만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핵심과 기본에 집중하는 그룹 부회장의 자세였다. 유리 같은 범용 제품은 경쟁이 치열하고 성숙한 시장이라 좋은 가격을 받기 힘들뿐더러 수익률이 박해 원가절감이 매우 중요하다. 상고방이 전 세계적으로 유리 제품에서 오랫동안 우위를 유지한 비결도 원가 경쟁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룹 부회장은 항상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소형 계산기를 가지고 다녔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 기본에 집중하는 일관된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포천》 선정 500대 기업들도 대개 이와 비슷하다. CEO를 비롯해 최고 경영진들은 모두 실무에 밝고 중요한 결정은 직접 내린다. 특히, 주요 제품 가격은 CEO 선에서 최종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기술이 중요한 산업 분야에서는 경영진들이 엔지니어 못지않고, 원가 관리가 중요한 회사에서는 회계사 못지않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광적일 정도로 투철하다.

한국 기업들은 어떤가? '가격 같은 실무'는 아랫사람이 하고 윗사람은 큰 그림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윗사람은 골프나 치며 큰 그림만 그린다. 뭐가 큰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윗사람이 가격 같은 '자잘한' 실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체면을 구기는 것으로 여긴다. 알량한 체면에 가장 중요한 가격 책정은 뒷전이다. 이런 회사의 수익률이 제대로 나올 리 없다. 이는 본질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것이 본질에 속하다면 더 이상 사소한 것이 아니다. 체면과 의전 같은 비본질적인 것에 신경 쓰면서 정작 중요한 일은 놓친다. 한국 기업의 임원들은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무에 밝지 못하다는 느낌을 간혹 받는다. 내용을 잘 모르니 자세한 논의를 하면 발을 빼거나 아랫사람에게 넘겨버린다. 다음으로 미룰 때도 많아 일이 지연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제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즉, 사소한 일과 큰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혹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으로 나누고 중요한 일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 한다. 중요한 일과 본질적인 것에 집중해야지 사소한 일과 큰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둑이 터지는 일도 작은 개미구멍으로 시작되며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의 비극적인 폭발은 작디작은 고무링에서 비롯되었다. 그냥 단순히 디테일에 집중하라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99.9가 있더라도 0.1이 모자라면 100이 될 수 없다.

상고방처럼 범용 제품 분야의 기업은 원가와 가격이 매우 중요하기에 그룹 부회장이 소형 계산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챙긴다. 기술이 중요한 첨단 기업이라면 기술에, 품질이 중요하다면 품질에 집중해야 한다. 기업뿐 아니다. 가수는 노래에, 화가는 그림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다. 기본과 본질에 집중하자.

- 『어떻게 생존하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 중에서
(김현중 지음 / 미래의창 / 304쪽 / 15,000원)<북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