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앙운동본부
▲최더함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의 창조 기사, 즉 창세기 1장에서 놓치기 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창조 이전 혹은 창조의 때에 온 우주의 상태가 어떠했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태양계와 지구를 벗어난 내용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천(마하샤임, 하늘)'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원어대로 하면 하늘과 '땅(에레츠)' 사이에는 접속사 '에트(and)'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에서 '천과 지'의 시간적 거리가 있음을 엿보게 됩니다.

그런데 1장 2절에서는 땅에 관한 기사로 이동합니다. 앞의 '천'에 관한 기사는 보도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앞의 '천'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늠하지 못하는 광대한 우주 전체로 생각합니다. 대신 2절부터 보도되는 땅은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를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필 것은 바로 '혼돈과 어둠의 상태'입니다. 2절에 보면 땅(지구 혹은 태양계)의 상태가 먼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입니다. 혼돈(토후)과 공허(보후)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용어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전혀 형체가 없는 텅 빈 상태와 아주 적막하고 무가치하며 헛된 것을 묘사할 때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개혁신학에서는 이 상태를 이렇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천'의 창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즉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 지구가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합하도록 조성된 상태가 아님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태초에 땅의 상태가 어둠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어둠의 상태이냐 하면,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의 정도입니다. 이것은 어둠에 대하여 인간 언어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묘사이자 표현입니다.

완전히 새까만 상태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학창시절 파로호에서 동네 청년들을 따라 멋모르고 잠수를 한 적이 있는데, 풍덩 빠진 순간 주위가 안전히 새까만 공간임을 알고서 얼마나 물속에서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로 인해 아주 오랫동안 트라우마가 생겨 자다가도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할 점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당신 스스로 어둠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어둠의 상태와 함께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의 세상을 선물하기 위해 스스로 혼돈스럽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의 세상, 어둠의 세상에서 홀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은 모두 사탄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탄의 것입니까? 밤과 어둠과 무질서가 사탄의 창조물입니까? 아뇨. 사탄은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왜곡하고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고 창조된 피조물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빛보다는 어둠을 먼저 창조하신 것을 언급합니다. 어둠으로부터 빛을 이끌어 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절을 보니, 하나님은 하루의 시작도 아침부터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밤에서 시작하여 아침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질서, 창조의 세계를 위해 기존의 질서를 먼저 무질서로 바꿉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에 모든 형태를 먼저 비우셨습니다. 6-7절을 보세요. 땅 위에 궁창이라는 빈 공간을 두고 궁창 위에 물을 두르시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십니다.

이 과정은 아기 잉태의 과정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임신한 모태 속에 먼저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 양수가 둘러쳐집니다. 다음에 태아가 잉태되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태아가 자라는 공간은 완전히 어둠의 공간입니다. 신기하게도 태아는 양수라는 어두운 물 속에서 죽지 않고 자랍니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에 비유하면, 모든 인생의 거듭남도 성령의 양수에 의해 둘러쳐집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시기 전에 캄캄한 무덤의 공간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 모두는 새로운 창조를 하기 전에 먼저 어둠으로부터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를 하시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창조의 고통을 짊어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듯,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기 전에 당신이 먼저 모든 고난의 짐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지만,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고통의 시간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물려받아 새로운 것을 발명할 때 거의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에디슨은 전기불이 켜지는 필라멘트를 발명하기 위해 무려 2천 번의 실험의 실패를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모든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스스로 뼈를 깎는 고통을 감당하십니다. 모든 새롭게 창조된 인생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과정을 겪습니다. 모세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의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새로 태어날 때 자신이 감당할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놀라운 무질서와 어둠과 혼돈의 가운데로 빠져 해맵니다. 놀라우리만치 하나님의 자녀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에는 안전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이때 나약한 이들은 주저앉아 버립니다. 혹여 이런 일들이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사탄의 미혹에 이끌린 것이라 착각하고 두려움에 빠져버립니다. 또 이런 사람을 바라보는 주위의 성도들은 너무 쉽게 그가 사탄의 시험에 걸려든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어둠을 허락하십니다. 당신의 전부를 바꾸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비우게 하십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속이 완전히 비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들어설 공간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매일 희로애락을 겪습니다. 당신의 삶에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들이 찾아옵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질병으로 쓰러져 병실에 눕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당신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듭난 인생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빈 공간에다 오직 주님의 것으로만 채우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기다리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양수라는 모태의 어둠속에서 출생을 기다리는 태아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빛이 당신의 인생에 비춰지는 그날을 고대하고 간절히 소망하며 어둠 속을 오히려 찬양하고 슬픔과 고난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병에 걸렸다고 자타가 증언합니다.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결과일까요?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들립니다. 교회의 부함과 화려함과 목회자들의 일탈에 대한 세상의 지탄도 크게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를 사랑하십니다. 한국교회가 있기에,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나름대로 걱정하면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회심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본분의 사명을 소홀히 한 점을 각성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뛰어야 합니다.

다만 이번엔 좀 더 겸허한 자세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한국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아멘.       

최더함(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