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악기가 있는 가즈오네 집에서 놀 때, 그 애는 하모니카로 ‘머나먼 스와니 강’을 가르쳐 주었다. 부러운 나머지 신애는 아버지가 경성에 가실 때, 하모니카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었던 것이다. 그때는 아직 이시가와가 아버지를 체포하러 다니지 않을 때였다.

이시가와가 눈초리에 웃음을 달고 말했다.

“가즈오가 왔다. 오르간(풍금) 치고 하모니카 불면서 가즈오랑 놀아라.”

“하이!(네)” 하고 신애는 냉큼 대답하였다.

빨리 놓여나고 싶어 신애는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이!” 하고 일본 말 대답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눈을 치뜨고 추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네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지?”

숨길 수 없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신애는 후루룩 큰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평양 가셨어요. …… 우리 큰고모부가 돌아가셔서요.”
“이번에는 평양이라……? 지난번엔 수원이라고 하더니, 하여튼 좋다.”

그는 국광(사과의 품종) 빛으로 물든 신애의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찌른다. 조가비처럼 입을 다문 신애는 얼른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시가와는 추궁자의 무서운 얼굴로 선생님처럼 말하였다.

“얘야, 황국신민皇國臣民은 정직해야 한다고 학교에서 배웠지?”
“배웠어요.”
“그런데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그렇지?”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였으나, 심문자의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이시가와는 포악한 위협을 멈추지 않는다.

“네 아버지를 여기서 찾아내면 너 혼날 줄 알아라. 너도 감옥에 처넣는다.”

조선의 영특한 딸은 거짓말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사요나라(안녕)’ 하고 얼른 일본말 인사를 했다. 그리곤 재빨리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였다.

‘나쁜 놈, 나쁜 일본 놈!’

온몸이 경직되어 어금니를 꽉 깨물었던 공포와 증오를 토해내며 신애는 황급히 걷는다. 그렇지만 달아나듯이 걷지는 않는다. 여느 때처럼 자박자박 걷는다. 뛰어가고 싶어도 그가 볼까 봐 적당한 보폭으로 침착하게 걸어간다.

가즈오는 신애와 유치원 때부터 소꿉친구였고 이시가와는 가즈오의 삼촌이었다. 가즈오의 아버지는 가즈오와 신애가 다니고 있는 소학교의 교장이고 어머니는 신애가 다닌 유치원의 원장이었다. 가즈오의 퉁퉁한 작은 아버지는 사거리에 있는 병원의 의사이다. 그들 삼형제는 조선어교육말살정책 담당으로 파견된 일본인의 후손들이었다.

새다리(鳥橋)를 지나자 신애는 뛰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를 잡으러 다니는 도깨비 같은 이시가와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황급히 아버지에게 이시가와를 만났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한 조급한 마음에서였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사스락 사스락 몸 부비는 소리를 내는 광활한 수수밭을 가로지르면 아기 주먹만 한 사과와 익기 시작한 복숭아가 주렁주렁한 과수원이 나온다. 흠뻑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뺨으로 신애는 넓은 과수원을 가로 질러 뒷동산으로 막 뛰어올라갔다.

소나무와 아카시아랑 편백나무, 떡갈나무들이 우거진 야산은 쨍쨍한 햇볕 아래 졸고 있었다. 무섭도록 조용하였다.

밤나무, 도토리나무들 뒤쪽 잡목 사이로 갈대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신애는 키 큰 상수리나무들 속에서도 유독 우람한 측백나무 앞에서 멈춰 섰다.

아득하고 환상적인 기분이 들도록 쓰르라미가 한낮의 열기를 노래하듯 울창한 숲 속에서 목청을 뽑고 있었다. 짧은 순간 신애는 안도의 심호흡을 토해 내었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갈대숲을 헤치며 샤아-샤아-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그밖엔 해치려고 위협하는 동물의 움직임도 사람의 자취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신애는 겁 많은 산새처럼 주위를 휘돌아본 다음 잽싸게 시든 풀 더미와 마른 청솔가지들을 헤치고 가마니를 들치었다. ㄴ자로 뚫린 굴은 허리를 구부려야 할 만큼의 깊이였다. 신애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굴속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등잔불 옆에 창백한 남자가 병든 산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새까만 수염이 턱과 양쪽 귀밑으로 더부룩이 자라서 흡사 가즈오네 집에서 본 일본 만화의 도둑놈 같은 섬뜩한 모습이었다. 몸에서 지푸라기 냄새가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신애야, 밥은……?”

밥을 보채는 아버지가 불쌍하여 신애는 울컥 목이 메인다.

“위험해서 엄마가 갖구 오신대요. 아버지, 이 편지요.”

아버지는 야위고 빛바랜 얼굴을 등잔불에 바짝 들이대고서 빠른 눈길로 읽기 시작한다. 읽어 갈수록 아버지의 해쓱한 얼굴엔 낙망의 빛이 역력해져 간다.

신애는 온천을 지난 변전소 앞에서 이시가와를 만난 걸 차근차근 보고하였다. 아버지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토하셨다.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웅얼웅얼 말하셨다.

“신애야, 원두막에 가 있어라. 엄마가 올 때까지 거기 있어라.”
“주애周愛나 가즈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아버지는 큰고모부가 돌아가셔서 평양에 갔다고 해라. 누가 물어도 그렇게 한 가지로만 말해야 한다. 네 동생 은애恩愛에게도.”

신애의 언니인 주애는 폐가 나빠서 학교를 휴학하고 있다. 중학교엘 입학하지 못 했다. 물론 이 고장엔 여자중학교가 없으니까 여자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외할머니 댁이 있는 수원으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자기 몸속의 병의 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애는 중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잠꼬대를 할 정도였다.

신애는 아버지에게 알고 있다는 표시로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차오르는 슬픔을 삼킨 채 잽싸고 익숙한 동작으로 굴을 빠져나왔다. 굴 입구를 덮고 있는 가마니에 올려진 청솔가지 위에 어린 아카시아 가지를 더 꺾어다 정성스레 덮고 그 위에 있던 마른 풀을 편편하게 잘 덮어놓았다. <계속>

김녕희 작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한국소설문학상·조연현문학상·만우문학상·PEN문학상 등 수상, 단편소설집 <고독한 축제> 등, 장편소설 <에덴의 강>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