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두세 달 전쯤 아는 사람 소개로 40대 후반의 한 남자를 만났다. 여자가 무려 16살 적은 관계다. 며칠 전, 여성은 남자 친구를 만난다고 집을 나갔다. 그런데 깜깜 무소식이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여성 집에서는 가출신고를 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비참한 죽음으로!

남자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여자친구의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다. 숨진 시신은 자기 집 냉장고 냉동실에 보관해 왔다. 두려운 나머지 범행 후 달아났다. 하지만 이틀 후 결국 한 민박집에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범행 직전 이웃들이 다 들릴 정도로 심하게 다퉜고, 화를 참지 못한 남성이 여친을 살해했던 것이다.

뭔가 석연찮다. 사랑에야 국경도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16살 차이라니. 쌍둥이도 세대차가 난다고 하는데. 16살 차이라면 좀 일찍 결혼한 사람이면 자식과 같은 나이가 아닌가? 서로 소통은 제대로 될까? 만남 자체에 문제가 없는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데이팅 상대를 선택할 때 좀 더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하는 건 아닌가?

50줄에 가까운 사람이 그렇게 어린 나이의 여성을 만나 교제를 한다면, 오빠나 아빠 품처럼 푸근한 맛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슨 일로 싸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감정이 상한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품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 나이가 아닌가? 세상을 알 만한 나이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만한 나이다. 문제를 풀어갈 정도로 세상을 경험한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성숙함은 어디로 간 걸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 이런 엽기적인 행각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움'이란 걸 왜들 잊고 사는 건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리 손해를 봤어도, 아무리 꼭지가 열린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안 되는 게 되는 사회 풍토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받아서는 안 될 전관예우를 계속 진행하는 것, 받아서는 안 될 뇌물과 수수료를 챙기는 것, 통용되면 거래가 어지러워지는 리베이트를 자꾸 통용시키니 세상은 고통스럽다. 멈춰야 하는 건 멈춰야 한다. 작동이 안 되는 브레이크는 나중에 큰 화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양심을 우리네 행동 제동장치로 주셨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양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양심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한두 번 허용하다 보면 나중에는 화인 맞은 양심처럼 작동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작은 양심의 파동에 즉각, 민감하게 반응하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잣대요 행동규범인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세상은 아름다워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살만 하며, 행복해질까? 그립다. 그리움을 넘어 그리스도인만이라도 그 길을 걸어가면 어떨까? 그러자면 교회 안에 말씀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으로 회귀하는 작업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런저런 변명 늘어놓지 않고 말씀에 '예~' 하고 순종하는 움직임!

30살 난 한 가정의 아들이 있다. 작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만취된 채 아들 집에 왔다. 아버지는 "숨겨 놓은 술을 달라"며 행패를 부렸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증세를 갖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난동을 부리고 집안 집기들을 부수곤 했다.

그 날도 아버지가 흉기로 아들을 때렸다. 다 큰 아들이다. 술 취한 아버지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는 지났다. 참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흉기를 빼앗았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수 차례 때렸다. 결국 아버지는 숨졌다.

상황이 이쯤 되자 겁이 덜컥 났다. 상황을 수습해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동생에게 부랴부랴 연락했다. 집으로 온 동생에게 자초지종 상황을 털어놓았다. 일은 벌어졌으니, 결국 형제는 일을 수습하기로 했다. 아버지 시신을 유기하기로 한 게다. 둔기는 버려 없앴다. 삽을 두 개 구입해서 아버지 시신을 가방에 담아 야산으로 옮겼다. 땅을 파고 아버지 시신을 묻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패륜아가 되고, 동생 역시 아버지를 암매장하는 걸 도운 패륜아가 되고 말았다. 천륜을 저버린 자식도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그런 자식으로 몰아간 아버지도 딱한 일이다. 왜 자식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물론 아버지가 그렇게 했을지라도 자식이 걸어야 할 정도야 있겠지. 그러나 술만 먹기만 하면 행패를 부리고 폭행을 하고 집기를 부수고 난동을 부리니, 자식 심정이 어땠을까? 무얼 배울 수 있을까?

술은 위험하다. 아무리 사람들이 술을 미화한다 할지라도 술이 오고가는 데는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격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술이 술을 마신다. 어느 도가 지나치게 되면 술이 사람을 들이키고 만다.

물론 '한두 잔으로 적당히 마시면 되지'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화난다고 들이키고, 속상하다고 들이킨다. 일이 안 된다고 들이키고, 섭섭하다고 들이킨다. 좋아서 들이키고, 축하한다고 들이킨다. 혼자 마시다가 두 세 사람이 만나게 되면 일차, 이차 간다. 그러다 보면 고주망태가 된다.

그렇게 하루 하루 마시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절제가 안 되고 통제불능 상태에 치닫는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건이 안 터질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술을 마신 채 운전을 한다. 이건 칼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자신의 죽음만 초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도 해친다. 그래서 정부에서 엄격한 단속을 하기로 했다. 사실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뒤늦은 감이 있다. 너무 무서운 게 음주운전이니까. 적당하게 편리를 봐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문화로 찌든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대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한다. 새 술에 취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새 술에 취하면 거룩한 노래, 찬양이 나온다. 거룩한 말과 아름다운 행동이 나온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든다.

세상에 취해 있는 이 시대에, 음란으로 물들어 있는 문화에, 알코올 중독뿐만 아니라 각종 중독으로 득실거리는 세상. 그래도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이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희망의 노래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서 찾는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캠페인들이 곳곳에서 일어날 때 희망은 살아난다. 그렇지 않고는 역주행하는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