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포로
▲이상봉 씨(가명)가 증언하고 있다. ⓒ주최측

함경북도 유선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일을 했던 북송 재일교포 이상봉 씨(가명)가, 최근 프레스센터에서 함경북도 탄광에서 만났던 국군포로에 대해 증언했다.

2007년 홀로 탈북한 이 씨는 가족이 여전히 북한에 있어 이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가명을 썼다. 가족들과는 3년 전 연락이 끊겼고, 이 씨는 증언을 마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6년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난 이 씨는 1960년 북송 귀국선에 올라 부모님과 함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국경이 맞닿은 북한의 최북단 회령시로 이주했다. 이 씨는 탄광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에 1966년 탄광 노동자의 삶을 선택했다.

이 씨는 “국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는 한 남북 정상회담은 있을 수 없다고 힘을 모아 외쳐주기 바란다”며 “1950년대에 국군 포로가 600명 정도 있었다는데, 내가 일을 시작한 1966년엔 낙반 사고, 가스 폭발 사고, 폐병 등으로 사망해 남아 있는 이들은 90명 정도였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곁을 잘 내어 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형님, 형님, 하면서 친해진 몇 명에 대해서만 말해 보겠다”고 했다.

그는 감시의 눈을 피해 강원 홍천에서 끌려온 경북 대구 출신 이승식 씨, 경기 평택 출신 주용수 씨, 경북 상주 출신 이상범 씨, 충청도 출신 박주용 씨, 강원 춘천 출신 박팔양 씨, 의용군 출신인 홍택 씨 등 국군 포로들과 사귀었다고 밝혔다.

이들 중 공개 처형된 이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뭐든지 열심히 하던 이승식 씨는 말이 없었지만, 4-5년 같이 지내다 보니 언젠가는 내게 일본말로 ‘할아버지, 아버지, 나, 이렇게 3대가 큰 한옥집에 살 때 머슴이 9명이나 있었다’고 했다. 집이 부자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가 브로커를 통해 여러 탄광을 뒤져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유선탄광에서 그를 찾아냈고, 아들 며느리 손주 등 5명을 탈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전혀 몰랐다”며 “이후 어느 날부터 그가 안 보였는데, 브로커가 다녀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두어 달 후 그가 중국에서 붙잡혀 강제북송돼 유선탄광으로 돌아와 유선강가 자갈밭에서 공개 처형되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민족배반자 이승식 가족에 대한 인민재판’이라고 적힌 커다란 벽보를 봤다”고 했다.

이후 평양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본의 아니게 함북 오지의 국군포로 밀집지역인 경원탄광에서 20년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국군포로를 만난 탈북민 1호 약사인 강춘녀(가명) 씨와 증언집 ‘아무러 데리러 오지 않았다’를 출간한 이혜민 위원(국군포로송환위원회)이 토론했다.

한편 이날 탈북자 김혜숙 씨는 4m 길이의 북한 개천 14호, 북창 18호 정치범 수용소의 내부 모습을 공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