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당한 ‘후스 후예’ 고백
파문당하고 설교 금지당해도 굴하지 않고 계속 사역
참된 교회의 표지, 실천하는 신앙, 복음 진리 강조해

감신대
▲아펜젤러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감신대
감리교신학대학교(총장 이후정 박사, 이하 감신대) 개교 135주년을 맞아 제2회 아펜젤러 학술대회가 지난 10월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감신대 중강당에서 열렸다.

감신대는 창시자 아펜젤러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지난 해부터 ‘아펜젤러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학술대회에서는 한국인 최초 목사안수 120주년을 기념했고, 올해는 종교개혁 기념일에 즈음해 종교개혁 이전 사상가들을 조명했다.

학술대회에서는 박경수 교수(장신대 교회사)가 ‘진리로 거룩하게: 발도, 위클리프, 후스’라는 제목으로 얀 후스(John Hus)의 대표작 <교회(De ecclesia)>에 나타난 그의 교회개혁 사상을 소개했다.

박경수 교수는 “종교개혁을 말할 때 우리는 보통 루터를 떠올리지만, 루터보다 100여 년 전 이미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교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린 인물이 바로 체코의 종교개혁자 후스”라며 “일찍이 루터는 ‘우리 모두는 후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고백함으로써 후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했다. 로마가톨릭교회에 이단으로 정죄받고 화형당한 후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 해도 위험천만한 일인데, 루터는 후스주의자라고 고백했던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에 의하면 얀 후스는 1371년경 보헤미아 남부 지역 후시네츠(Husinec)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390년경 프라하 대학 인문학부에 입학했다. 그 무렵 프라하에 널리 소개된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4-1384)의 사상을 접했고, 1393년 바칼라르(Bakalar, 오늘날 학사) 학위와 1396년 마기스터(Magister, 오늘날 석사) 학위를 받았다. 후스는 1398-1399년 프라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신학을 공부했고, 1403년 잠시 프라하 대학 학장을 맡기도 했다.

얀 후스 Jan Hus John Huss
▲얀 후스(Jan Hus).
1400년 로마가톨릭교회 사제로 서품받은 후 1401년 프라하 성 미가엘교회에서 설교했고, 1402년부터 베들레헴채플에서 10년 간 3천 회 이상 설교했다. 그는 대중들이 사용하는 체코어로 설교했고, 사람들 정서에 맞는 체코어 찬송을 만들어 보급했다. 후스의 설교는 프라하 대학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청중들에게로 확산됐다.

1406년 이후 프라하에서는 위클리프 사상에 대한 찬반 논쟁이 본격화됐다. 후스와 체코 출신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따랐고, 로마가톨릭교회 추기경 츠비넥(Zbynek)과 독일 출신들은 반대편에 섰다. 1409년 후스가 6년 만에 다시 프라하 대학 학장으로 선출되면서 교회갱신과 사회개혁 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새롭게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츠비넥 추기경이 자신을 도와준 보답으로 1409년 12월 교서를 내려 후스의 설교를 금지시키고 종교재판에 회부하져 했다.

후스가 굴복하지 않고 설교를 전하자, 교황은 1411년 3월 후스를 파문시켰다. 그러나 후스는 더욱 목소리를 높여 면벌부 판매의 부당성을 공격했는데, 이로 인해 황제와도 결별하게 됐다. 결국 이듬해인 1412년 11월 초순 프라하를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후스는 프라하 인근에 지내다 1413년 4월 남부 보헤미아 코지흐라텍(Kozí Hrádek), 1414년 7월 서부 보헤미아 크라코베치(Krakovec bei Rakoviník)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어디서든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체코어로 전한 후스의 설교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독일 콘스탄츠(Konstanz) 공의회에 후스를 참석시키려 했다. 후스는 9월 1일 황제로부터 신변안전을 보장받고 콘스탄츠로 향했다. 10월 11일 출발해 11월 3일 도착했지만, 몇 주 만인 11월 28일 추기경의 명령으로 도미니칸 수도원 지하 감옥에 갇혔다.

교황 요하네스 23세의 참석 아래 배심위원회가 1414년 12월 4일 결성됐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후스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황제도 세 번이나 공개석상에서 후스가 자신을 변호하도록 주선했다. 후스 반대파들은 공의회 결정이 궁극적 권위를 갖고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강변했지만, 후스는 진리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서이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 되신다고 주장했다. 결국 1415년 7월 6일 공의회 전체회의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당했고, 사형 선고를 받고 화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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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감신대
얀 후스의 대표작은 <교회>로, 그는 책 내용 때문에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했다. 집필의 직접적 계기는 1413년 2월 프라하 대학 신학부 교수 8명이 프라하 도심에서 면벌부를 팔겠다는 교황의 요청에 서명한 때문이었다. 8명의 무조건적·강압적 복종 요구에 대한 후스의 대답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총 23장의 <교회> 내용은 이러하다. 1-6장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 7-10장에서는 교회가 누구에게 속했고 그 토대가 무엇인지, 교회가 기초한 반석이 무엇인지, 11-18장은 교황권과 교회권력자들에 대한 비판, 19-23장에서는 권위에 대한 불복종 문제 등이다.

먼저 교회의 속성에 대해 “단지 교회 안에 있고 높은 지위를 차지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지가 선택받음의 척도가 된다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어그러진 삶을 정면으로 논박하고 있다”며 “계명을 따르지 않는 교황이나 성직자라면 교회의 머리는커녕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만이 보편·개별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시고,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선택된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들이다. 이러한 후스의 주장은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수장인 교황이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기존 사상에 커다란 위협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교황권에 대해선 “로마가톨릭교회 박사들은 교황을 지상 교회의 머리요 심장이며 중심이요 끊임없는 원천이고 충분한 피난처라고 말하지만, 이는 교황을 제4의 위격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교황을 성령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며 “교회의 반석, 즉 토대 역시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교회의 권위는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첫 번째 원인이시고, 사제는 그 다음”이라고 설명했다.

삶으로 드러나는 신앙에 관해선 “지식은 윤리로, 신앙은 실천으로, 앎은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특히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라는 이유만으로 권위를 가질 수 없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합당하게 살아야 참된 직분자요 권위자가 된다”며 “참된 신앙은 사랑의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삶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행위야 말로 신앙의 진실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얼핏 보면 이런 주장은 루터의 이신칭의(以信稱義)와 반대로 보이지만, 둘을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마치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을 그 맥락을 도외시한 채 반대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이처럼 교황과 고위 성직자에 대한 후스의 비판적 견해는 ‘저항권’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교회 안의 정당한 권위에는 복종해야 하지만 악하고 잘못된 권위에는 복종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참된 길”이라며 “면벌부 판매에 저항하고 교황의 설교금지령에 불복종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설교금지령에 저항한 것은, 그런 명령이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고 교회에 해를 끼치며 편파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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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임진수·서종원·박경수 교수, 이후정 총장, 박해정·김인수 교수. ⓒ감신대
박경수 교수는 “후스를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할 정도로, 그의 <교회>는 15세기 로마가톨릭교회에 큰 도전이었고 16세기 종교개혁을 향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며 이 책이 15세기 체코뿐 아니라 21세기 한국교회에도 유용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지점을 짚었다.

먼저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박 교수는 “목사든 장로든 성도든 누구든지 교회의 주인 노릇이나 머리 행세를 하려 해선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라며 “후스의 가르침은 ‘한국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를 자성하도록 한다”고 밝혔다.

둘째로 ‘실천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는 “후스는 우리에게 단지 머리로만 동의하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고, 경건의 진보를 분명히 드러내는 신앙, 삶으로 입증되는 신앙,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신앙, 열매 맺는 신앙을 가지라고 강력하게 도전한다”고 말했다.

셋째로 ‘복음이 가르치는 진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박 교수는 “종교개혁은 다름 아닌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운동이었다. 후스는 루터보다 100년이나 앞서, 혼탁한 때에는 성서가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처럼, 우리가 복음의 진리로 돌아갈 때 모든 군더더기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얀 후스 콘스탄츠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1415)에서 얀 후스가 신앙을 변증하는 모습을 담은 체코 화가 바크라프 브로지이크(Václav Brožík, 1851-1901)의 그림(1883).
박경수 교수는 “후스는 자신의 말처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음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오늘날 프라하를 방문하는 사람은 구시가지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후스 동상을 보게 된다”며 “후스는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좁은 길이며 어려운 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후스가 콘스탄츠에서 죽임 당한지 60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이후 논찬은 감신대 김인수 교수(조직신학)와 서종원 교수(교회사)가 각각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