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 열대 지역 고적함·목가적 분위기에서 착안
<에덴동산에서 추방>, 안식의 <에덴동산>과 극명 대조
전형적 초상화 익숙했던 사람들에 심리적 불편함 안겨
인간 탄생과 타락 이야기 잘 담아낸 ‘높은 양식의 풍경’

토마스 콜 에덴동산
▲토마스 콜, 에덴 동산, 캔버스에 유채, 97x134cm, 1828, 아몬 카터 뮤지엄 오브 아메리카 소장.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초기작 <에덴동산>(1828)과 <에덴동산에서 추방>(1828)은 ‘국립디자인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Design) 연례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에덴동산의 찬란했던 모습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후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다.

콜은 독특하게도 창세기의 주요 장면을 테마로 삼았음에도 지형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자신이 두 작품에 대해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것보다 높은 양식의 풍경”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매우 의욕적인 시도를 하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처럼 자신이 있었던 것은 바로 ‘지형적인 풍경(topographical landscape)’에서 ‘역사적 풍경(historical landscape)’으로의 변화를 일컫는다.

여기서 ‘역사적 풍경’은 역사화와 풍경화를 혼합한 새로운 형태를 말한다. 가령 이전의 회화가 성경적·역사적·신화적 내용을 ‘역사화’라는 형식에 담았다면, ‘역사적 풍경’은 인물을 주제로 삼기보다는 풍경화의 형태를 띠면서도 상상력을 접목한 회화를 말한다.

당시 풍미했던 낭만주의 화가들 역시 역사적 사건에 풍경적 요소를 결합시켰는데, 영국의 J. M. W 터너라든지 존 마틴(John Martin)이 그러한 화가였다.

두 작품 모두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다룬 것이나, 막상 제목을 빼놓고 보면 전체 화면을 아우르는 풍경의 요인으로 인해 그림의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축복의 땅 에덴을 모티브로 한 <에덴동산>은 전원적 고요함과 대자연의 평화로움을 노래한다. 시냇물이 흐르고 빨간 낙엽으로 채색된 숲, 탁 트인 평원, 넓디넓은 하늘 등은 시적인 분위기를 풍길 뿐 아니라 안식을 제공하고 있다.

주위는 무성한 꽃들과 녹색의 숲으로 뒤덮여 있고 멀리로는 높은 산에서 폭포가 내려온다. <에덴동산>은 콜이 카리브해의 세인트 유스타티아 섬을 여행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열대 지역의 고적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아담과 하와가 손을 높이 들고 경배를 드리는데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귀뜸해 준다.

토마스 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토마스 콜, 에덴동산에서 추방, 캔버스에 유채, 100x138cm, 1828, 보스톤 파인아트 뮤지엄 소장.
<에덴 동산>이 완성되자 콜은 <에덴동산에서 추방>에 착수하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의 이야기는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펼쳐진다.

오른쪽에서 콜은 이전의 그림에서 무성한 열대 초목, 야자수, 높은 산 밑에 위치한 잔잔한 호수의 이미지를 반복 사용하면서 타락 전의 세계를 슬쩍 엿보게 한다. 화면은 아치 모양의 암석 구조물에 의해 양분되며 우측에는 에덴동산이 좌측에는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룹들(Cherubim)의 불 칼을 피해 급하게 피신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유성(流星)처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돌진한다. 타락의 외연이 급속히 세계 전체로 퍼져 버렸다. 그들은 지금 나락을 헤아릴 수 없는 계곡 위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중이며, 그 아래에 먹이의 숨통을 끊고 있는 늑대 또는 하이에나와 그 위를 배회하는 독수리가 눈에 띄고, 죽은 나무와 비바람에 휘청거리는 나무가 아담과 하와를 맞이하고 있다.

멀리 뒤쪽엔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분출하고 있고, 주위는 온통 시커먼 잿더미로 뒤덮여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사슴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아담과 하와가 안식을 누리던 <에덴동산>의 장면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전형적인 초상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이같은 ‘역사적 풍경’은 심리적 불편함을 안겨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작품이 발표되자 미들틴트(Middle-Tint)라는 필명의 저널리스트는 이 작품이 “존 마틴의 그림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며 그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 콜은 “그림은 내가 존 마틴을 알기 훨씬 전에 구상되고 제작되었다”고 반박하였다. 과연 콜은 존 마틴의 작품을 베낀 것일까?

문제가 된 것은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 삽화에 실린 존 마틴(John Martin)의 <아담과 하와- 파라다이스에서 추방>(Adam and Eve- Driven out of Paradise, 1827)이란 판화 작품이다.

인물의 포즈가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화가들이 이전의 도상을 참고하는 관례로 미루어 볼 때 ‘그대로 베낀 것’이란 주장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세히 살펴보면 마틴의 그림에선 하와가 팔을 들어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고 아담은 비탄에 젖어 고개를 숙이는 데 반해, 콜의 그림에선 아담이 화염검을 돌아보고 있고 하와는 고개를 숙이는 자세로 남녀가 뒤바뀐 모습도 발견된다.

콜의 인물은 인물이 하도 작아 모방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더욱이 콜의 도상은 화염검의 표현에 있어 존 마틴의 얼버무린 듯한 표현을 능가하고 있다.

콜의 작품은 존 마틴의 판화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리얼한데, 이는 콜이 마틴을 추종하기보다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냈다고 할만하다. 이 작품에 대해 <뉴욕 미러(New-York Mirror)> 지는 이 작품이 “추방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에게 올바른 인상을 전달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근래에는 이 작품이 환경 문제를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즉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가 서부의 확장과 산업화로 인해 황무지가 점점 더 파괴되면서, 미국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훼손한다는 우려를 나타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실제로 경제 변화와 시장 혁명은 콜이 살던 시대에 직면한 과제였고, 자연은 산업화의 논리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콜이 환경 파괴를 방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사려 깊은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이 주장 역시 일리가 있으나, 그럼에도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성격은 인간의 타락에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논란이 일기는 했어도, 토마스 콜은 두 작품을 통해 ‘높은 양식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초기작들은 인간의 탄생과 타락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그가 신앙적으로 잘 양육받아 왔으며 예술의 중심에 기독교 정신을 투영하게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유럽에서 이주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물리적 피조 세계를 신 중심적(theocentric)으로 파악하였기에, 영국에서 이주한 토마스 콜 역시 자신의 작품을 경건하게 화폭에 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그림이 외견상 풍경화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내용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 죄와 암흑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한때는 선한 창조주의 사랑과 신망을 독차지한 시절도 있었으나, 이제는 파괴된 세상에서 저주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할 운명이다.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에덴동산에서 보았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것은 죄가 침범해 창조질서가 교란되어 있는 엄청나게 혼란스런 세계이다. 육중한 아치 구조물 너머의 초록 동산이 어쩜 그렇게 평화스럽고 찬란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서성록
▲서성록 교수.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