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작 <삶의 항해>, 신앙 여정 파노라마 식 그려내
<천로역정>과 비슷, 사실적 풍경과 알레고리 연결
온갖 난관과 시험 거쳐 나약한 자아 깨닫고 구원行
무엇 잘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로

삶의 항해 토마스 콜
▲토마스 콜, 삶의 항해- 유년기, 캔버스에 유채, 134x195cm, 1842,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19세기 중반 미국인들은 ‘움직이는 파노라마(Moving Panorama)’를 즐겨 감상했다. 두루마리 그림처럼 전문 화가들이 제작한 그림을 길게 펼쳐놓고, 장면이 넘어갈 때마다 해설가의 이야기와 음악가의 연주를 곁들이는 저테크(low-tech) 공연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그림과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일종의 공감각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인기 있는 공연은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 파노라마’였다. 이 파노라마는 길이만도 255미터나 되어, 관람에 2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이 ‘무빙 파노라마’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이 상연된 첫 해에 1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파노라마가 제작되기 전에 미국판 『천로역정』을 제작한 화가가 있었다. <삶의 항해>(The Voyage of Life)를 그린 토마스 콜(Thomas Cole,1801-1848)이 그 장본인이다.

‘미국의 천로역정’으로 불리는 이 연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담았는데, 순례자는 절망의 늪, 죽음의 그림자계곡, 절망의 동굴 등을 통과하여 천상의 도시에 이르는 등 『천로역정』과 비슷한 스토리를 지닌다.

사실적인 풍경과 알레고리를 연결 짓는 것은 콜의 작품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며, 문학에서나 회화에서나 알레고리를 기용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의 예술적 전통이기도 했다.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등 모두 4부작으로 구성돼 있는 <삶의 항해>를 살펴보자.

삶의 항해 토마스 콜
▲토마스 콜, 삶의 항해- 청년기, 캔버스에 유채, 134x194cm, 1842,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먼저 <유년기>(Childhood, 1839-1840)는 어린 아이가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다. 아이가 동굴에서 나오는 것은 고전적 신화 모티브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다(시 139:15)”는 성경의 메타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천사(‘하나님의 영’을 상징)가 뒤에서 노를 잡고 아이를 보살펴 준다. 주위 풍경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를 축복하듯이 꽃이 피어 있고 물결도 잔잔하다. 초원의 꽃과 식물도 어린 아이를 축복해준다. 기대와 희망만이 아이를 기다려주는 것같다.

<청년기>(Youth, 1840)는 유아가 젊은이로 자라 홀로 여행에 나선다. <유년기>의 만발한 꽃들은 <청년기>에 자리를 내어주고, 척박한 산맥으로 출발을 서두른다.

천사 역할도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천사는 뒷전으로 물러나 청년을 떠나보낸다. 낙엽수림 한 가운데 있는 야자나무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를 연상시키는데, 초기 작품 <에덴동산에서 추방>(Expulsion from the Garden of Eden,1828)에는 죄와 환상에 빠진 젊은이들이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즉 콜은 초기작 <에덴동산에서 추방>에서 보인 플롯과 비슷하게, 생명으로 가득 찬 곳을 떠나 기나긴 장정에 오른다.

그러나 콜의 <청년기>가 <에덴동산에서 추방>과 동일한 내용을 지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결과, 동산에서 쫓겨나는 장면에 비해 <청년기>에서는 스스로 길을 나서는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유년기>과 다른 점은 천사 대신 청년이 ‘키’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은 자력으로도 얼마든지 삶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그의 포즈를 보면 행선지를 분명하게 가리킨 것으로 보아, 청년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가 성령의 도움 없이 홀로 여행을 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천사의 이별 장면이 뜻하는 바는 청년의 단독 여행을 의미하며,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실질적인 대화와 교제가 없는 여행을 암시한다.

삶의 항해 토마스 콜
▲토마스 콜, 삶의 항해- 장년기, 캔버스에 유채, 134x202cm, 1840,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어느덧 세월이 흘러 청년은 어른이 되었다. <장년기>(Manhood, 1840)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진다. 거센 물줄기가 곤두박질치는 폭포 앞에서 주인공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다. 폭포가 내리치고 빠른 물살이 흰 이빨을 드러내며 주인공을 집어삼킬 기세이다.

콜이 말한 것처럼 주인공은 “보트의 키를 잃어버렸다.” 그를 환영해주던 파릇파릇한 들판의 꽃과 식물들은 이제 죽은 나무와 거친 암석, 먹구름이 낀 하늘로 바뀌었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통제불능의 상태에 휩싸여 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천사는 멀리 구름 속에 떨어져 이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 장면에 대해 콜은 “위를 향해 탄원하는 여행자의 모습은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상황임을 보여주고, 그러한 신앙은 그를 피할 수 없는 파괴로부터 구한다”고 적었다.

마지막 작품인 <노년기>(Old Age, 1840)의 경우, 장면이 바뀌어 주인공은 인생의 끝자락에 와 있다. 주인공은 노인이 되면서 몸도 쇠약해졌고 감각도 무뎌졌다. 콜이 기술한 대로 “강은 영원의 바다로 흘러간다.”

그의 곁에는 천사가 그를 안내한다. 노인은 더 이상 키를 잡을 필요가 없다. 주님 없이 스스로 여행을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삶의 항해 토마스 콜
▲토마스 콜, 삶의 항해- 노년기, 캔버스에 유채, 163x231cm, 1840, Munson Williams Proctor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그런데 저 멀리 층층이 쌓인 먹구름이 갈라지면서 광명한 빛이 출현한다. 그 빛으로부터 축복의 전령이 날갯짓을 하며 그에게 다가온다.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혔던 위기감, 수많은 시험들, 낭패감과 좌절감 따위는 더 이상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조금 후에는 천사가 영광의 노래가 멈추지 않는 ‘빛의 도성’으로 주인공을 인도해줄 것이다.

일련의 작품에서 토마스 콜은 삶의 여행을 영적으로 표현했다. 감상에 치우친 빅토리아식 취향을 간간이 엿볼 수 있지만,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온갖 난관과 시험을 거치면서 자아의 나약함을 깨닫고 결국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구원의 방주’에 몸을 싣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삶의 항해>에서 여행자는 자기 힘으로 생명을 구할 수 없다. 그는 조류(潮流)에 수동적으로 의탁할 뿐인데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길이 없어 보인다.

진 에드워드 비스(Gene Edward Veith)가 정확히 짚어낸 것처럼, 이 작품에는 인간은 자기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손길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적 관점에서의 인간 이해’가 함축돼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띄워 보낸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요 6:44)”.

이 땅을 항해 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도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

삶의 항해 토마스 콜
▲화가 토마스 콜.

서성록 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