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강두수 영수 개척, 일제 하에도 조선말 설교
순사들 멱살 잡고 끌어내려, 동방요배도 안 했을 듯

영주 연당교회 소강석
▲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강경희 전도사에게 역사사적지 지정 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영주 연당교회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25호 지정 감사예배’가 19일 개최됐다. 이 자리에는 예장 합동 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직접 참석했다.

연당교회는 113년 전인 1908년 강두수 영수가 개척한 교회이다. 강두수 영수의 아버지는 철저하게 한학을 배운 사람으로, 그의 아들이 복음을 접하게 되고 애덤스 선교사를 만나 신앙이 장성하게 돼 연당교회를 세웠다.

이에 대해 소강석 목사는 “당시 일제는 우리 국민들에게 ‘신도 신앙’을 강요했다. 그래서 교회에 신당을 차려놓도록 하고 예배 전에 동방요배를 하도록 하며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했다. 교역자들은 일본말로 설교하도록 했다”며 “그런데 강두수 영수님은 일본어 대신 조선말로 설교하셨다”고 전했다.

소 목사는 “그러자 일본 순사들이 강대상에 올라와 설교하고 있는 강두수 영수님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끌어내렸다고 한다”며 “이런 것으로 보아, 아마 연당교회는 일본의 신사도 만들어놓지 않고 동방요배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연당교회에 꼭 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됐다. 그런데 농촌이 열악하게 되고 인구가 줄다 보니, 지금 연당교회는 교인이 두 명 밖에 안 된다”며 “그런 연당교회를 강두수 영수님의 증손녀인 강경희 전도사님이 섬기신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이 아프고 미어지면서, 더더욱 꼭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영주 연당교회 소강석
▲예배에서 소강석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또 “총회장이 큰 교회만 다니고, 시골의 작은 교회는 안간다는 오해를 안 받기 위해, 오히려 지원금을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는 이날 지원금 1천만원을 전달했다.

소강석 목사는 전날 SNS에서 “연당교회의 스토리를 알고 나니 더 궁금해진다.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113년의 역사를 지낸 교회이지만 교인이 세 명밖에 없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고 기도하며 가고 있다”며 “물론 시골 교회 생태계상 어쩔 수 없다지만,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시 교회가 일어설 수 없을지 상상하며 지친 몸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소 목사는 “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고향에 가지 못해 전주 초청교회(담임 이기봉 목사)에서 열린 ‘프레어 어게인’ 기도회 참석 후, 남원에 사시는 형님들도 뵙고 부모님 묘소도 들리려 했다”며 “그런데 총회역사위원장 신종철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연당교회를 가게 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故 박정하 장로님의 묘소는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부모님 묘소는 5-6년 동안 한 번도 들려본 적이 없다. 물론 저를 대신해 집사람이 내려가 꽃다발을 헌화하고 온 적은 있지만, 자식으로서는 불효자 같다”고도 했다.

영주 연당교회 소강석
▲연당교회 성도들.
이날 1부 예배에서는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장 신종철 목사 사회로 회계 손원재 장로의 기도, 사료분과 서기 박인식 목사의 성경봉독, 금천소망교회 장로회의 특송 후 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신 32:6-9)’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다.

2부 ‘사적지 지정식’은 부위원장 강진상 목사 사회로 총회훈장상훈위원장 박창식 목사의 사적지 소개, 총회장의 역사사적지 증서 증정, 연당교회 강경희 전도사의 교회소개 및 사료기증, 금천소망교회 강석진 목사의 감사인사, 안동노회장 박현준 목사의 환영인사, 증경부총회장 윤선율 장로의 축사, 위원회 총무 서정수 목사의 광고 이후 현판 제막식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