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 Backpack Hike Away Path Mountain Hiking 내리막 오르막 등산 길 하이킹 순례 모험 여정
▲ⓒ픽사베이
본문: 창세기 12장 1-4절

카피라이터 김은주는 《너와 나의 1센치미터》에서 행복이 가장 싫어하는 세 가지 단어를 이야기한다.

첫째, ‘지금 말고 그때’
둘째. ‘이곳 말고 저 곳’
셋째, ‘당신 말고 그 사람’

행복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그녀가 지목한 단어인 ‘그때’, ‘저 곳’, ‘ 그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과 상관없는 단어들이다.

이 말은 행복이란 자신과 깊은 관련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행복은 나와 관련 있어야 한다. 나와 관련이 없으면 행복은 내 것이 되지 않는다. 파랑새가 될 뿐이다.

행복이 싫어하는 단어가 또 있다. 전염병이다. 지금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다. 코로나19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을 만들어내고 있다.

행복을 만들어내는 단어가 있다. ‘말씀(4절)’이다. 오늘 아브라함은 행복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는 행복하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좋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니,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 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내린 결론이 있다. 행복한 사람은 할 것을 한다. 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할 것은 ‘함께’, ‘배려’, ‘감사’ 등이다. 사람들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 많다. 그 중에 하지 않아야 할 것은 불평과 비난이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시간을 아껴 쓰는 것이다.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믿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데,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듯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죽은 사람이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고 싶은 데 잘 하지 못한다. 그 중 하나가 배려와 공감이다. 특히 공감이다.

장정빈은 그의 책 《공감이 먼저다》에서 남자들은 ‘공감맹(盲)’이라고 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저는 다른 남자들보다 공감능력이 더 떨어진다.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보다는 저 자신에게 집중한는 스타일이다. 별명인 ‘직진 순재’인 배우 이순재처럼, 앞만 보고 직진하는 스타일이다.

예전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에서, 이순재 선생님에게 ‘직진 순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자막을 보고 ‘딱 나’라고 인정했다. 그렇다고 매정한 사람은 아니다. 따뜻한 마음은 지녔다.

제가 ‘공감맹’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다. 친구들 몇 명이 만나 대화하고 있었다. 친구가 말을 하고 있는데, 저는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았다. 그러자 제가 보인 반응은 공감맹이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친구가 ‘왜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냐’고 핀잔을 주었다. 저는 ‘직진 순재’가 아니라 ‘직진 도인’이다. 누군가 별 듣고 싶은 마음이 없는 말을 오래 하면, 딴청을 피운다. 딴청 피우기 힘들면, 하나님께 ‘하나님 그만 말하게 해주세요’라고 속으로 기도도 한다.

세상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려 한다. 하지만 때론 할 수 없는 것도 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놀라운 효력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기도였다. 이 기도를 언젠가부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신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제가 신학교를 가게 되었다. 늘 약골로 살던 제가 약골을 벗어나게 되었다.

성경에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엘리야의 이야기다. 엘리야 이야기는 신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말씀이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과 싸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엘리야가 승리했다. 신학교 때 이 설교를 들을 때마다 짜릿했다. 감동이 넘쳐났고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 내용이 왕상 18장 36절부터 40절이다.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저는 신학교 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때 많은 은혜를 받았다. 오늘 말씀도 제게 엄청난 감동을 주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던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을 떠나 어느 작은 섬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면 갈 자신이 없다. 아니 믿음이 없다.

언젠가 친구들과 양평 용문에 다녀온 적 있다. 그 때 한 친구가 용문과 같이 산수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고 싶단다. 하지만 저를 그럴 자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오케이 했지만 저는 마음 속으로 거절했다. 그 이유는 친구들처럼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달랐다. 하나님께 한 말씀 하시니, 가잘 살기 좋은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겠다고 나선다. 그러자 조카 롯도 함께 갔다.

아브라함과 저의 차이가, 바로 믿음의 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 저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속되는 것만으로 최고로 여겼다. 저는 하나님께 소속된 것만으로 최고로 여기지 못한다. 아직 믿음이 없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하나님의 특징이 있다. 믿음의 사람을 좋아하신다. 믿음의 사람과 대화하고 싶어하신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1절과 2절이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한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말씀만 믿고 행동한다. 즉각 순종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땅을 떠나서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떠나기를 미룰 것이다. ‘하나님!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하나님! 한 번 기도해보겠습니다’.

저만 이렇게 기도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가장 잘 하는 행동이 있다. ‘하나님! 기도해보겠습니다’

기도하다가 세월만 보낸다. 결국에는 가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다. 즉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다.

가끔 친구들이 좋은 세미나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한다. 저는 그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 그 말은 가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이유는 가기 싫기 때문이다. 공부는 세미나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세미나를 엄청 다녔다. 세미나가 나를 성장시켜 주지 못했다. 저는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의 성장을 위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하나의 세미나가 되지 않도록 하려 몸부림친다. 많은 공부를 통해 놀라운 성장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우리는 좋은 곳에 같이 가자고 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기 바쁘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달랐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니 떠난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니 간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니, 복을 받을 줄 안다.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소속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소속을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 소속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소속이다. 이 땅 시민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다. 세상의 권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속을 정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아브라함만 하나님께 소속을 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하게 여기셨다.

예수님은 항상 묵상했다. 내 소속이 어디인가? 내가 누구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항상 고민한다. 내가 어느 부서에 가야 하는가? 내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가? 인사를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즉 사람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아브라함은 정하고 싶은 소속이 하나님이었다. 속하는 싶은 곳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자 했다. 믿음으로 순종하길 원했다.

아브라함의 원래 소속은 갈대아 우르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소속이 갈대아 우르가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의 소속이 하나님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자기 소속을 떠나 말씀을 따라 갔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의 소속은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우리가 취한 것은 세상의 부가 아니라 영적인 부다. 세상의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세상적 큰 민족이 아니라 작더라도 하나님 민족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이 갖는 것, 세상 권세로 사는 것,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소속에 속해 있는가?’에 있다. 그 다음 하나님께 소속된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인간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속할 곳은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소속된 곳의 법규대로 살아가야 한다. 저는 군대에서 소속이 11사단 전차중대 3소대 소속이었다. 군대생활 내내 3소대 막사에서 생활을 했다. 언제나 3소대 소대원으로 생활했다.

군대 용어 중 ‘탈영’이란 말이 있다. 소속을 벗어나면 탈영병이 된다. 탈영병이 되면 먼저 영창을 간다. 그 다음 군법회의에 넘겨진다.

자기가 속한 소속에서 살아야 한다. 벗어나면 안 된다. 탈영하면 큰일 난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소속이 하나님인가? 삶의 터전이 하나님 나라인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 소속이다. 삶의 터전도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곁을 떠나면 안 된다. 삶의 터전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면 안 된다.

예전 교회 위층에 전자발찌를 찬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한 번에 전자발찌를 교회에 두면 십일조도 하고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제안했다.

저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자기 소속에 맞게 살라고 충고까지 해줬다. 그 뒤로 그 사람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 협박도 몇 번 받았다.

자녀들의 소속은 부모가 사는 집이다. 어릴 적에는 집을 떠나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부모 곁을 떠나려 한다. 아들도 어릴 적에는 집을 떠나면 죽는 줄 알았는데, 대학을 졸업하니 분가하려 했다. 소속이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최근에 분가를 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소속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소속이니, 하나님 말씀을 따른 것이다.

그 결과 정든 고향을 미련 하나도 없이 떠났다. 집안 어른들 말은 거절했다. 하지만 소속을 하나님으로 정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한다. 그 다음 즉각적으로 말씀대로 떠난다.

이사를 할 때는 갈 집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사를 하는데 갈 집이 없었다. 딱 한 가지만 아는 것이 있었다. 1절,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뿐이다. 하나님을 알고 계신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속되기 위해 먼저 버릴 것을 버렸다. 아니 버릴 수 없는 것도 버렸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소속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예수님과 같이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속되기 위해 버릴 것을 버렸고, 떠날 것에서 떠났다.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다.

<천로역정>의 주인공인 크리스천도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 좁은 문, 환한 빛이 보이는 하나님 나라에 소속되기 위해 떠난다.

자신이 소속돼야 할 곳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인 것을 알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하고 외치며 광야 저편을 향해 달려간다. 결국 그는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당도한다.

당신은 소속이 어디인가?

소속이 하나님이라면,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떠날 것 떠나야 한다. 그 다음 우리가 속할 땅, 하나님 나라에 속해야 한다.

성찬식을 할 때마다 성찬기를 덮는 보자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 보자기에 쓰여 있는 글자가 있다.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염하라는 뜻이다. 왜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 ‘나를 기념하라’는 말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가? 우리의 소속이 예수님의 보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속은 하나님에게 있다. 땅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다.

다니엘은 소속이 하나님이었다. 소속이 하나님이었기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도 매일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다. 죽음이 임박해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살던 사람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나는 날마다 죽노라”며 자기의 자아를 죽이고자 했다. 자아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자기 소속을 명백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낸다. 그의 소속을 바꿔주기 위함이시다. 우리는 소속을 바꾸는 것이 쉽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 바꾸기도 쉽지 않다. 교회 바꾸기도 쉽지 않다. 10년이 넘도록 교회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도 봤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소속을 바꾸는 것은 분명 어렵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바꿨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으로 소속을 안 바꾸었으면 바꿔라. 소속을 바꾸었으면 바뀐 소속에 맞게 살아가라.

아브라함은 소속이 바뀌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우리의 현 소속은 하나님이시다. 그럼 우리도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세상의 유혹이 아니다. 전문가의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께 소속을 바꾸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꿔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소속을 바꿔주셨다.

우리 소속도 하나님께서 바꿔주셨다. 그러니 이제부터 속한 소속의 규법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쉽게 소속을 바꿔주신 것이 아니다. 어렵게 바꾸어주셨다. 여러 단계를 거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으로 소속을 바꾸는 데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셋째, 아브라함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것이 4절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 선택받음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른다.

우리가 소속을 바꾸거나 소속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말씀이다. 즉 말씀만이 우리의 소속을 정한다. 말씀이 소속을 정하는 데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오늘 아브라함은 소속이 하나님이었다. 그럼 우리도 소속이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해 불렀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또한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다(출 34:19)”.

한 번 정해진 소속으로 평생 가야 한다. 하나님은 평생 우리를 끌고 가신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의 소속이 되려면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한눈 팔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만 영원히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신앙생활은 소속을 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 소속을 정하는 것이다. 한 번 정해진 소속인데, 우상을 섬김으로, 이단에 빠짐으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다른 것에 한눈 팔지 말아야 한다.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께 소속을 정해 살고, 하나님께 소속된 자답게 멋진 삶을 살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