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4-6)

말라기서는 저작 시기나 성경의 배열 순서에서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 말라기가 활동하였던 시기를 대략 주전 450년경으로 잡고 있는데, 그때는 스룹바벨에 의해 두 번째 성전이 지어진 지 65년이 지난 후이다. 성전 재건과 함께 기대되었던 메시아 시대가 실현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이 성행하였으며, 하나님과의 언약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십일조마저도 경홀히 여기는 영적 분위기로 바뀌었다.

말라기는 자신의 마지막 예언에서 모세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할 것을 촉구하면서,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약속하고 있다. 말라기에 앞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사 40:3). 그러나 말라기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를 ‘내 사자’(말 3:1)라고 불렀고, 후에는 ‘엘리야’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말 4:5).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을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로 거론했지만, 그가 ‘선지자 엘리야’라고 지목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례 요한이 “네가 엘리야냐?”라는 질문을 받은 적은 있었다(요 1:21). 변화산에서 예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셨는데(마 17:3), 그것은 모세가 율법, 곧 모세 오경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심판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심판의 어두운 그늘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추어주신 것이다. 인간의 범죄와 부패로 인하여 심판이 불가피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늘 미래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분이시다. 선지자로 오실 엘리야는 구원을 베푸는 메시아가 아니다. 다만 그분이 오시는 길의 예비자이다.

메시아의 예비자로 오실 선지자 엘리야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이다. 곧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 돌이키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돌이키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쉬브’에는, ‘돌아오게 하다’라는 기본적 의미와 함께 ‘회복하다’ 혹은 ‘복구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곧 상실된 본래의 정상적인 기능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겠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신앙 형성은 부모가 자녀들을 말씀으로 보살피는 가정교육에서 이루어진다. 교육방법은 질의응답인데,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기본 신앙이 흔들리면서 가정 중심의 신앙교육도 느슨해졌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들의 마음이 정상적으로 교류되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부모와 자녀의 마음을 정상적으로 돌이키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마음을 서로 돌이키게 하려는 것은, 호렙에서 모세를 통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주신 ‘여호와의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말 4:4). 여기에서 ‘기억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한 회상이나 암기로서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주어진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율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회복을 전제한 율법의 기억이다(마 22:34-40; 막 12:28-31; 눅 10:25-28).

엘리야가 와서 막혔던 세대 간의 교류를 원활하게 열어준다면,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신앙이 회복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저주로 치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저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렘’인데, 그 의미는 하나도 남김 없는 파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으로서의 파멸을 말한다. 여리고를 점령할 때,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한 것이 곧 ‘헤렘’이다(수 6:17)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은 성 안의 모든 것을 칼날로 멸하였다(수 6:21).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세대 간의 대화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우리의 교회 안에서도 별반 큰 차이가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의 가정에서마저도 부모와 자녀 사이에 원활한 교류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의 영적 피폐함을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말라기 선지자가 예고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헤렘’으로 이 땅을 치실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우리들 모두가 자녀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더욱 힘쓸 때이다.

권혁승 교수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영문과(B. A.)를 나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Hebrew University, Ph. D.)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고 엔게디선교회 지도목사, 수정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권 교수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고전 4:16)을 목적으로 ‘날마다 말씀 따라 새롭게’라는 제목의 글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전하고 있다. 이 칼럼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해당 블로그에서 퍼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