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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하라" (마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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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설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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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2.17 12:13   

날짜: 2011년 12월 11일
본문: 계시록 3: 14~22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계시록 3: 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까지 우리는 소아시아 7 교회를 다 돌아보게 됩니다. 당시에 교회 일곱 개만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대표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칭찬과 질책, 권면의 말씀들이 어쩌면 당시의 모든 교회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을 것이고, 오늘 날 우리 교회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정(旅程)”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시간과 길이 있듯이, 삶에서 어려움과 기쁨이 같이 하듯이, 소아시아의 교회들도 그렇게 길을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에서 갈채를 받는 다는 것, 때로는 견딘다는 것 모두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소중한 것은 또한 그 교회들이 처한 상황이 다 같은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그 순간 순간 답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분명하고 확실하게 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아시아 성지순례를 하며 사실은 거꾸로 여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탄블에서 비행기로 카파도기아에 내려 내륙에서 해안으로 2천 km정도를 버스를 타며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4월 초의 날씨가 무척 추웠습니다. 고원지대의 내륙은 그렇게 녹녹한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지나 첫 번째 순례지인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 날씨가 참 환상적이었습니다.
영상으로 라오디게아의 장면을 잠깐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좋은 날씨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있었던 위치의 문제입니다. 위치를 바꾸면 환경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위치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충만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 기대에 못 미치고 있을 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는 질책만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여전합니다.

어떤 목사님과 대화하는 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틀리다는 것이지요.
여자들은 1cm 목숨을 건답니다.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바르고, 귀거리를 하고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남자는 손끝에 자신의 인생을 건답니다. 그래서 시계가 중요하고, 가방이 중요하고, 만년필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어디에 인생을 걸고 자신을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그 무엇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면 어떻게 보여주고 싶은가요?
우리는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만큼 힘들고 변수가 많다는 것이지요. 세계기록은 2008년 9월 28일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 3분 59초입니다.
2008년 LA 에서는 182kg의 거구인 스모선수 켈리는 11시간 48분 16초의 기록으로 역대 마라톤을 완주한 기네스북 최중량자로 기록되었습니다. 올해 경기에서는 2시간을 앞당긴 9시간 48분의 기록을 작성했습니다.
또한 2008년 3월 2일에 열렸던 마라톤 대회에 밥 웨런드라는 57세된 사람은 무려 7일 5시간 45분에 결쳐서 달렸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본다면 마라톤이 끝나고 7일이 지난 다음에데 도착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월남전쟁에서 동료를 구하다가 폭탄에 두 다리가 절단된 하반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 다리 대신 두 팔로 그 먼 길을 달렸던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2시간에서 4시간에 달리는 이 코스를 7일이 넘게 달린 것이지요.
그러나 누구도 이 사람을 실패자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산 사람이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외면했을지 모르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인텨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 주셨기에 가능하였다.”라고 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상황이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끝까지 완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

라오디게아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14. .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오디게아에 찾아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아멘’이라는 말이 ‘실로, 참으로’라는 뜻이라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 단어들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보증인 동시에 심판의 경고입니다.
칭찬이 없는 책망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아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가 많이 들었던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 ”라는 말은 지역의 특징을 알면 이해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라오디게아라는 지역은 빌라델비아라는 곳에서 동남쪽으로 약72Km 정도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양털을 가지고 옷감을 만드는 산업이 발달했고 금융산업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풍요가 있었지만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를 못해서 이웃도시에서 물을 끌어다가 사용을 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얻어 사용하는 물은 온천수와 지하수였다고 합니다.
도시 북쪽으로 11km 정도 떨어 진 곳이 ‘히에라볼리’ 라는 곳인데 이곳에서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은 ‘골로새’라는 지역인데 그 곳에서 지하수를 공급 받았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물을 공급받다 보니 이들이 물을 마실 때가 되면 뜨겁지도 않고 시원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환경이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성격이 적극적이지 못하고 늘 미온적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런 경향이 교회에도 그대로 드러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 훌러 신학교에서 유명한 맥가브란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깨어서 활발하게 일하는 교인이 대개 10%입니다. 살짝 자고 있는 사람이 80%입니다. 그리고 푹 자고 있는 교인이 10%라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10%의 깨어 움직이는 교인들과 활기차게 일하여야 합니다. 살짝 자고 있는 80%를 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푹 자고 있는 10%는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푹 자고 있는 사람 10%를 깨우면 깨고 나서 신경질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교인이 교회마가 80%라는 것입니다.

에브라함 링컨이 남북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남군과 북군의 경계선에 란카스타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언제 누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의논하였습니다.
<우리는 비상시를 대비하자. 언제 북군이 들어올지, 언제 남군이 들어올지 모른다. 위에는 북군의 옷을 입자. 밑에는 남군의 옷을 입자. 갑자기 북군이 쳐들어오면 우리 위에 옷을 입었다고 살릴 것이다. 남군이 갑자기 쳐들어오면 우리 남군의 옷을 입었다고 살릴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북군이 쳐들어 와서는 남군의 아래옷을 입은 것을 보고 죽였습니다. 남군이 쳐들어 와서는 북군의 위에 옷을 입었다고 죽였습니다. 이래저래 다 죽였습니다.
중간은 안 됩니다. 누구나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닙니다. 미지근하면 토하여 낸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여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편지를 가만히 보면 이 교회가 특별히 가지고 있는 오류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단에 감염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이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온적인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라아디게아 교회만큼 가장 적절하게 오늘 날의 교회를 설명하는 말이 없을 듯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면 너무 뜨거워서 데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오래전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저 멀리서 보는 장면이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폭포를 멀리서도 볼 수 있지만 거대한 물줄기와 소리가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가 볼 수 있는 공원도 있습니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공원주변에서 느끼는 폭포는 훨씬 현실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굉장한 것은 배를 타고 폭포 가까이, 그리고 폭포를 지나 안쪽 동굴까지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우비를 입고 흠뻑 물안개를 맞으며 갖다오는 코스는 가본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감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며 느끼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깊숙한 관계 속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주변에서만 머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신앙의 주변에 머물고 있는 교회의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무섭게 책망하고 계신 것이죠.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할 바에는 토해 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차가운 것을 용인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뜨거우라는 말씀이라는 것쯤은 다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뜨겁다”라는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신”과 “전심”을 잘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뜨겁다는 것이 무분별한 열심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전심으로 주님을 섬길 때, 우리의 가슴과 머리 모두가 주님을 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묵상’이 없는 헌신은 광신 행위가 되는 것이요,
‘헌신’이 없는 묵상은 마비된 상태에 불과 합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가장 무서운 사람이 “성령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직통 계시를 받는 순간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자신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 이단이란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의 방향과 진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기도가 말씀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뜨거우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전심으로 기도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것은 헌신에 이르는 묵상이요 묵상에서 나오는 헌신입니다.
즉, 교회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열정입니다.

미지근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이 무엇입니까? 17절의 말씀을 보세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의 만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뜨거움을 상실 한 것 같습니다. 갈급함이 없는 자에게 어떻게 열심과 헌신이 나오겠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될 것으로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적인 의미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척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주후 60년 경 당시의 도시들이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을 때도 라오디게아는 로마 원로원에 관례적 보조금을 청원하지 않고도 즉각 재건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자부심, 또한 유명한 의술 학교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교만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전염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만의 영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만족하게 만들고 열심을 앗아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모습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행위의 온도를 측정하라
영국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유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1866년에 이 교회의 소속 교인은 4,366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였습니다.
하루는 스펄전이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12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366명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가 다 미지근한 신자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 험악한 세대를 이기려면 주님과의 관계가 뜨거워야 합니다. 이것만이 이기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과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바울처럼 항상 자기 부족을 인식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만하면 됐겠지”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앞에 있는 것을 놓고 “나는 부족하다. 더 뛰어야 해. 더 은혜를 받아야 해. 더 기도해야 해”라고 안타까워하는 자세를 일생 동안 유지하면 그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교회나 교회 지도자나 이와 같은 발전, 개혁, 자기 수정, 자기 부족을 느끼지 않고는 마음이 금방 식고 맙니다. 당신이 안고 있는 이런저런 시험 거리들이 실상은 영적으로 식어버린 데서 생긴 부작용은 아닌지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 옥한흠

열정이 식어버린 신앙이 얼마나 무섭고. 때로는 비참해 지는지 모릅니다.
육신의 만족함이 채워지면 그만이라는 생각들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 줍니까?
나의 꿈을 이루면 된다는 생각들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의 꿈이 아닌, 나의 꿈이 이루어지면 만족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줄 아십니까?
돼지들은 목 뼈가 굳어서 하늘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돼지가 하늘을 보는 때는 벌러덩 자빠져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돼지의 꿈이 먹고 쉬고 편안한 것에 만족하는 것인 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햄이 되고, 스팸이 되고 소세지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지난 4월 초하루에 말씀을 전한 미주 만나교회의 유지현 목사의 설교 본문이 에스더서 였습니다. 만일 에스더의 꿈이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면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명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를 귀환하던 시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포로로 살면서 너무나 편안했고,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포기하기 싫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곳에서 온 민족이 말살 당할 수 있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에스더도, 이스라엘 백성도 금식하며 기도할 수 밖에 없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게 됩니다.

신앙의 역동성은 매일 매일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편안함으로 인해, 우리의 욕망을 이루는 것으로 인해 식어져 버린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역겹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토하여 버리리라. . ”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다구요? 편안하고 자식들이 잘 된다구요?
그래서 교양있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구요?
주일은 크리스천인데, 세상이 누리는 것 다 누리고 그렇게 살아간다구요?
그런데 주님께서 보니까, 그들이 너무나 비참합니다. 영적으로 치유받아야 하는데 자신들 스스로만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13:11절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했는데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 26:41절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였지만 자신들의 채워진 욕망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도를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 모습이 영적으로 얼마나 빈곤한지 보라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 같으나 아무것도 없이 피폐한 영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 세상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영적인 세계에서 그들은 너무나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로 쓰시는 데 있어서, 에스더의 황후 자리가 귀합니까?
과부의 두 렙돈이 귀합니까? 아니면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던 기적을 만든 오병이어가 귀합니까?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것이 동일 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뜨거운 열정과 헌신 사명이 있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실 뿐입니다. 본문에 주목합시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에 주목합시다.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 보고 있는데 자신들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권면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권면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부요함이 아니라, 불로 연단하여 얻어진 금 같은 순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 무엇입니까? 절대로 자족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 23: 10절을 보세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때로 우리들의 삶과 신앙에서 적극적인 고난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훈련의 장소에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사단은 늘 우리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편안하자, 좀 더 즐기자. . .”
그래서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적극적인 연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게 되는 때에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또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순결함과 거룩함 없이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대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는 ‘거룩함’에 들어간 사람,
‘순결함’을 지킨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순결함은 잃어버리는 우리가 행할 권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쉬게 말해 볼까요? 담배를 피는 순간 담배를 안 피울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처녀와 총각이 순결을 잃어버리는 순간, 지킬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 . .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시나요? 왜냐하면 그것을 지켜야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51:7절에 다윗은 자신의 허물과 부끄러움을 고침 받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 보다 희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깨끗하고 정결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즉, 지금의 육신적인 안목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 승리하려면 영적인 눈으로 보고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올바를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야 올바를 판단을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벽마다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려고 보니 연탄불이 꺼져 있더랍니다. 이른 새벽이라 옆집 연탄과 바꾸어 놓고 새벽에 왔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계심에 대하여 감감한 사람입니다.
어느 가게 주인이 담임 목사님에게 외상 장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물건을 사고도 외상값을 갚지 않은 사람들 중에 교인들의 이름이 수두룩 합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오지 말라!”
우리의 눈이 어두어지면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밝아져야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로고스 법률사무소에서 양인평 장로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걱정입니다. 교회마다 분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쟁을 가지고 세상법정을로 가져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고 시시비비를 가리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이러한 영적 유혹을 이기기 위해 오늘 본문은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것인데, 결국은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귀결이 됩니다. "어떻게?"에 대한 문제이지요.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유진소 목사님이 쓴 [말씀과 함께 하나님과 함께]에 나오는 내용을 보세요.
진리의 귀머거리
20세기 인물들 가운데 최고의 지성을 꼽으라면 아마도 영국의 버틀란트 러셀(Bertrand Russell)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러셀은 어릴 때부터 매우 똑똑했습니다. 교회에 다녔던 그는 총명한 머리로 성경을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마침내 성경을 목사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되자 그는 성경 지식을 가지고 수많은 목사님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고, 그들의 무지한 성경 지식을 비웃기도 했습니다.
결국 러셀이 그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쓴 책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의 허구성을 통박하는 내용의 책입니다. 러셀은 성경을 많이 알았던 까닭에 도리어 예수를 안 믿고 교만해져서 기독교를 우습게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면 변화되는 것이 분명한데 왜 러셀은 변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성경 지식 때문에 예수를 안 믿게 되었을까요? 그가 알고 있던 그 많은 말씀이 왜 그를 신앙인으로 변화시키지 못했을까요? 참 의아합니다.
제가 그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찾은 답이 ‘묵상’이었습니다. 러셀은 성경 말씀을 정보나 지식으로 알았을 뿐 묵상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묵상하지 않은 말씀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 않습니다. 묵상하지 않으면 말씀 자체를 아는 것이 도리어 영적으로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쌓아 둔 말씀과 묵상으로 내 것이 된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그 차이 때문에 러셀의 인생이 이렇게 결론 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은사, 열정, 성령의 역사가 인간을 얼마나 교만하게 만드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지식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단도 주여, 주여 합니다.
문제는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누구를 주님으로 고백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단도 방언을 합니다. 거짓 방언을 말하는 사람도 봅니다.
하나님의 방언은 긍정과 믿음의 말이지만 사단의 방언은 부정과 흩으는 말들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이 미지근한 신자들을 조롱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관동대학에서 목회를 하던 이은상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집회를 하는데 한 청년이 귀신에 들렸습니다. 중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에서 목사님이 다가가 기도를 합니다. "주여!" 부르짖었더니, 귀신들린 아이에 입에서도 "주여 주여,, ," 하면서 조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보하며 기도하니까, 너도 우리 편을 떼로 데려올 수 있다고 조롱합니다.
결국은 말씀으로 이기게 되었는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기도하기 시작할 때, 귀신이 떨기 시작했고,
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자신의 몸을 거룩한 성전으로 고백하게 될 때 귀신이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그 때부터 결심하게 된 것이 있답니다. 말씀이 없는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미지근하다!"라는 것은 애매모호하게 "주여, 주여!" 한다는 것이지요. 분명하게 우리의 삶에서 주인이 누구인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우리의 모호함을 집요하게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댜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 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열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미혹케 하는 수많은 소리들이 들이지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안목" 등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방해하지 않습니까?

축복의 말씀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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