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솔로몬은 말한다(전 3:1). 이것은 경험이 과거에 대하여, 지나간 일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삶을 다 살고 그의 삶을 구원했던 노인이 과거를 기억하며 사색할 때, 노인의 지혜가 성숙했을 때, 노인이 말하는 방식이다.

노인에게 일과 소모적인 노력의 시기는 지나갔다. 노인에게 춤을 추던 젊은 시기도 지나갔다. 노인에게는 연애하던 시기도 지나갔다. 삶은 더 이상 노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노인 역시 삶에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기대하는 중에 판단을 바꿀 수 없다. 그는 결정하는 중에 자신의 판단을 바꿀 수 없다. 후회하는 중에 그의 판단을 바꿀 수 없다.

모든 판단은 완전히 과거인 것인 양, 현재와는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과거에 의해 동일하게 되었다. 노인에게 모든 일은 과거가 되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어쨌든 살아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간주되어야 한다면, 삶은 과거의 사건일 뿐이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현존하는 과업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야 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과 삶이 분리되어 삶은 끝났고 지나가 버렸으며 그는 부재자인 것처럼 간주되어야 한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암울한 것인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도 모든 것들은 다 때가 있다고 말한 저 말씀과 동일하게 끝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슬픈 지혜인가! 이 익숙한 말씀과 함께 한다면,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전 3:9)!”

만약 솔로몬이 “모든 것에는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때를 가지고 있었다”고 과거로 말했다면, 그 의미는 더욱 명백했을텐데. 노인으로서 그가 과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가 누군가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성서의 본문 말씀은 과거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조심하라!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변하는 저 인간의 삶에 대하여 말하는 자는 회중에게 그가 어떤 시기에 있는지 말하려거든 조심해야 한다.

사람 안에 있는 덧없는 것과 변화무쌍한 것들과 관계하는 지혜를 다룰 때에는 그 지혜가 해를 가하지 않도록, 깨지기 쉬운 것들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오직 영원만이 항상 적용되고, 언제나 존재하고, 언제나 진실하며, 모든 나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한다.

과거에 대하여 노인이 말한 것은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젊은이나 어른이 현재에 대하여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리석다.

젊은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어른은 그 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조금 더 나이든 사람은 솔로몬이 한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 있다. 곧 기쁨을 위해 춤출 때가 있다는 것이다.

왜 그가 솔로몬에게 동의하는가? 왜냐하면 그에게 춤출 때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지나간 무언가를 말하는 자처럼 말한다.

춤출 수 있는 젊음과 기쁨이 있을 당시에 그 기회가 그에게 거절되었든, 그가 무도장의 초대에 기쁘게 승낙했든, 조금 더 나이든 사람은 조용하게 말할 것이다.

“춤출 때가 있었지.”

그러나 무도장에 급히 춤을 추러 가는 것과 감옥처럼 집에 틀어박혀야 하는 것은 젊은이에게는 두 개의 다른 사건이기 때문에 젊은이에게 이 둘을 동일하게 연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곧, 젊은이는 말한다.

“한 가지를 위한 때가 있고 다른 한 가지를 위한 때가 있지.”

사람은 세월과 함께 변한다. 어떤 한 국면이 성취될 때마다 그는 공평하게 그 다양한 내용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더 현명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변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니까.

춤이 젊은이를 흥분시킨 것처럼 똑같이 지금 그를 흥분시킨 무언가 있을 수 있다. 장난감이 아이를 사로잡은 것처럼 똑같이 지금 그를 사로잡은 무언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사람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노인은 마지막 변화이다. 그는 지금 과거인 모든 변화무쌍한 것들 대하여 공평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일까? 사람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때에 맞는 인간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말했는가?

확실히 가장 중요한 것과 가장 결정적인 것이 누락되었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인간의 삶의 자연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외재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식물이나 동물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 또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변한다. 동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린 시절과는 다른 욕구를 갖는다.

동물의 삶에서도 때로는 기쁨이 있고 때로는 곤경을 겪어야 한다. 진실로 늦은 가을에, 꽃도 세월의 지혜를 퍼뜨릴 수 있고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지(전 3:2). 흐르는 물로 인해, 꽃이 활짝 필 때가 있고 시들어 죽고 말아 잊혀질 때가 있지.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받을 때가 있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질 때가 있지. 돌봄을 받을 때가 있고 미움받고 뽑힐 때가 있지. 아침의 따스한 햇빛에 기뻐할 때가 있고 밤의 추위에 죽어버릴 때가 있지.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거야. 일하는 자의 수고가 다 무슨 유익이 있을까?”

동물이 늙어갈 때에도 세월의 지혜로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기뻐 뛰놀 때가 있고 땅에 기어다닐 때가 있지. 일찍 일어날 때가 있고 늦게 잘 때가 있지. 들에서 뛰어 다닐 때가 있고 헤어져 죽을 때가 있지. 사랑하는 자와 둥지를 틀 때도 있고 지붕 위에 홀로 앉아 있을 때도 있지. 구름을 향해 위로 날아올라갈 때가 있고 공격을 받아 땅에 떨어질 때가 있지.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거야. 일하는 자의 수고가 다 무슨 유익이 있을까?”

당신이 꽃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대답할 것이다.

“그래, 꽃이 죽고 나면 이야기는 끝나지.”

그렇지 않았다면, 물론 이야기는 처음과는 달랐어야 하며, 계속되면서 끝까지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꽃이 다른 식으로 대답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고 가정해 보라. 그녀는 덧붙여 말한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왜냐하면 내가 죽을 때도, 불멸하기(immortal) 때문이지.”

이것은 이상한 말이 아닌가? 다시 말해, 꽃이 불멸이었다면, 불멸성(immortality)은 꽃이 죽지 않도록 막는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불멸성은 삶의 매 순간마다 현존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삶에 대한 이야기는 변화무쌍한 모든 것, 사멸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것과 불멸성의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불멸성은 말하자면, 마지막 단계에 죽음의 순간에 끼어든 마지막 변화일 수 없다. 반대로, 불멸성은 세월의 변화와 함께 변하지 않는 불변성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솔로몬이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는 노인의 말에 다음을 덧붙인 이유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그리스도인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변화에 대한 이야기와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다양한 방식은 결국 혼란스럽다.

특히 노인의 입에서 나올 때 그렇다. 오직 영원만이 덕을 세운다. 세월의 지혜는 혼란스럽다. 오직 영원의 지혜만이 덕을 세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