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어거스틴.
농락이란 단어는 익숙하다. 그런데 한자어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모르는 단어를 발견하면 주워 담아 수첩에 쌓아 놓는 버릇이 있는 나에게 농락이란 단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농락(籠絡)은 대그릇 ‘농(롱)’에 헌솜 ‘락’자를 쓴다. 옥편을 찾아 뜻을 자세히 살피니 이렇다. 농(籠)은 대그릇, 삼태기 즉 용기를 뜻하고, 락(絡)은 헌 솜, 누이지 아니한 삼, 명주를 뜻 한다.

알고 있는 의미와 단어는 너무 달랐다. 어떻게 현재 알고 있는 ‘농락’이란 의미가 생겼을까? 호기심이 더 발동했다. 이번에 네이버 단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명사] 새장과 고삐라는 뜻으로,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서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

어원을 찾아보면 현재의 단어가 가진 뜻이 드러난다. 한자로 농(籠)은 대나무와 하늘을 나는 용이란 단어가 합해진 합성어다.

죽(竹) + 용(龍) = 농(籠)

풀이하면 하늘을 나는 용이라도, 대나무 그릇에 담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종종 농락은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교태나 요염함을 말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속여 자신의 마음으로 조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락(絡)자는 솜을 말하는데 연결된다는 뜻이다. 구슬도 꿰매야 보배란 말이 있듯, 실오라기도 서로 연결되어야 천이 되고, 쓸 만한 물건이 된다. 연락, 맥락 등의 단어들에 나타난다.

농과 락은 전혀 다른 의미지만, 두 글자가 합해져 부정적 의미로 발전한다. 대상물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주무르는 것이 된 것이다. 농락을 능동태와 수동태의 동사로 바꾸기도 한다. 능동태로 바꾸면 ‘농락하다’가 되고, 수동태는 ‘농락당하다’이다. 염상섭의 <이심>의 문장이다.

“하여간 주의를 하란 말이야. 이번만 하더라도 감옥까지 가게 한 것은 그놈의 농락이니.”

한승원의 <해일>의 문장이다.

“그는 최봉일과 구양수의 손바닥 위에서 한 마리의 벌레처럼 농락을 당하다가 놓여난 것만 같이 분하고 억울했다.”

수단이 된 인간은 타자로서만 존재한다. ‘나와 너’의 존재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수단으로서의 존재는 무(無)다. 수단이 되는 순간 인격이 아닌 물건이 된다.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서로가 서로를 농락할 뿐이다. ‘나’의 ‘너’는 없고, 오로지 ‘그것’만 있게 된다. 그것만의 세계는 ‘나’가 사라지고, ‘나’도 ‘그것’이 되어 인간의 종말이 일어난다. ‘나’가 ‘너’를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그것’이 되고, 그것과 그것은 분절(分節)을 넘어 단절(斷切)이 일어난다.

단절은 다시 ‘절망(切望)’을 낳고, ‘절망’은 다시 ‘무(無)’가 된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이 간파한 것처럼 소유는 ‘너’를 ‘그것’으로 치환시킴으로 ‘나’를 ‘그것’으로 만들고, ‘나’와 ‘너’의 관계는 기계적이고 수단화되어 관계의 종말을 가져온다.

교만한 인간은 서로를 농락하는 것도 부족하여, 하나님까지 농락하려 든다. 자신의 의도대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어리석음이야말로 가장 큰 교만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절대 농락당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지혜로 도달할 수 없으며,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다스리신다. 믿음은 하나님이심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예측할 수도 없고, 농락할 수도 없다. 다만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지혜요 믿음이다.

행복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사람이 무엇을 마음대로 이용할 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모시고 향유할 때’ 행복하다고 <행복한 삶>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하나님을 조종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치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린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