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37 영화
▲한국교회 내부의 신실한 측면과 위선적 측면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영화 <로마서 8:37>.
※해당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편집자 주

언론과 예고편을 통해 알려진 바 한국교회의 죄악과 치부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에, 금번 개봉한 영화 <로마서 8:37>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기대 반 우려 반의 시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예고편이 연출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혹시 상당히 편향된 시각으로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바도 있었다.

이런 염려는 영화 관람 후 상당 부분 불식되었는데, 이는 한국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는 신연식 감독의 시각 속에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시사회에서 감독이 인터뷰 중 밝힌 바와 다름없이, 영화 전체의 서사는 죄악은 죄악대로, 믿음은 믿음대로, 한국교회의 실태를 과장됨 없이 보여주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인으로서 심히 불편한 심정을 유발하는 '죄된' 장면도 다수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선보이고 있는 한국교회 내부의 다양한 층위들은 이런 죄된 현실을 극복하려 하는 신앙의 모습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기존 한국교회의 부당한 면모를 폭로하는 영화들은 여럿 존재했지만, <로마서 8:37>은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하며, 기존의 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한 세밀한 한국교회 내부묘사를 단행한다.

<로마서 8:37>이 채택한 이 세밀한 표현 방식은 제도화된 교회와 참된 회심을 추구하는 기독교인 간의 갈등이 현실에서 어떤 양태로 촉발되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된 듯하다.

한국교회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 보는 이런 주도면밀함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한국의 일반 중대형 교회들에서 목격할 수 있는 모든 양태의 비리와 부조리들을 거의 하나도 누락하지 않고 목격할 수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교회 내부의 불신앙과 부도덕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사안은, 개교회 내 권력투쟁과 목회자의 성범죄다. 그러나 이 두 줄기의 죄악에 연관되거나 이로부터 파생된 각종 불의의 행태들도 영화 전체 장면과 대사들 속에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폭로의 시선들은 한국교회 외부로부터 교회를 바라보는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시선이 아니라, 교회 내부로부터 교회를 바라보는 염려와 안타까움을 담아낸 시선이다. 이 영화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는 회개와 교회 내 개혁을 촉구하는 심정이 가득하다. 바로 이 점이 <로마서 8:37>의 탁월한 면모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이 영화의 연출 방향은 단순히 SBS TV <그것이 알고싶다>의 영화판 각색 수준을 넘어선다. 이 영화는 한국교회가, 그리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죄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 어떤 심령과 태도로 접근해야 할지 깊게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를 선사한다.

로마서 8:37 영화
▲부순교회의 목회 주도권을 두고 대결을 벌이는 원로목사 박강길과 후임목사 박요섭. 한국 장로교의 교회정치 원리가 왜곡되는 현장을 보여준다.
◈교회와 권력: 교역자 및 장로들 간 권력쟁투

장신대 역사신학 주임교수 서원모 박사에 의하면, 현재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1922년 장로교 헌법을 기본 골격으로 삼아 형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치리회 가운데 목사를 치리하는 노회의 기능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것이 바로 이 1922년 헌법이다. 이 헌법이 명시하고 있는 교회정치 원리는 한국 개신교 선교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미국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상당부분 수용하여 정립된 것이다.

장로교 치리원칙을 살펴보면, 각 개교회는 세례교인 수가 30인을 넘어서는 시점부터 장로를 선출하여 조직교회(당회를 구성한 교회)가 되고, 이런 당회가 최소 30개가 모여 1개 노회를 이룬다. 한국 장로교 교회정치는 바로 이 노회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회가 담당한 업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목사 및 교역자의 위임, 해임, 전임, 이명 및 권징을 결정하는 일이다. 당회는 해당 개교회의 목회와 행정에 대한 치리를 수행하고, 노회는 이 당회를 이끌어가는 목사에 대한 치리를 수행한다.

영화 <로마서 8:37>은 한국의 한 중대형 교회(부순교회) 당회 내부에서 목회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권력투쟁,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당회, 노회, 교단 사이의 갈등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순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시킨 원로목사(박강길 목사)와 그 뒤를 계승한 젊은 후임목사(강요섭 목사) 사이에 벌어지는 목사직 쟁취를 위한 이전투구 장면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는 선거사무실, 혹은 법적투쟁을 준비하는 기업 법무팀의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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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주도권을 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밤낮없이 계책을 세우는 부순교회 사역자들. 저 열정을 전도, 선교,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에 집중시켜야 하지 않을까?
교회에서 법무팀을 운영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영적 차원에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하겠지만, 사역의 차원에서는 분명 사회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단체로서 법과 제도를 준수할 의무와 그에 의해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교회가 복음사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직면할 수 있는 여러 법적 문제에 대해 법조인 성도들의 자문과 도움을 얻는 것은 온당하다 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점은, 한국교회 중대형 교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이런 법률적 '봉사'를 목회자 및 교회의 비상식적인 행각들을 무마하는 데 활용해 왔다는 점이다.

<로마서 8:37>은 교회정치 현장 묘사를 통해 이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원로목사 측은 후임목사의 설교 가운데 이단적 발언을 문제삼고, 여신도 성추행 문제를 공론화하며 금전 협상을 유도한다. 후임목사는 원로목사의 비자금, 그 가운데 정치권과 결탁을 위해 사용한 비자금을 문제삼아 그가 펼치는 공격의 부당함을 알리려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양측은 각기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들, 그리고 노회를 구성하는 타교회 목사들을 포섭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시키고, 교회 내에 법조인을 포함시킨 태스크포스(TF) 팀을 구성해 대응한다.

이 대목은 중세 말에 시행된 가톨릭 교회의 교황 선출 제도 콘클라베(Conclave)를 연상시킨다. 피선거권과 선거권이 모두 추기경들에게 배속된 가운데, 전체 추기경 수 3분의 2 이상의 득표자가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정한 이 제도는, 중세 말 심각하게 변질돼 뇌물과 성직거래의 온상으로 자리잡는다.

이 시기 콘클라베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추기경들에게 금전적 보상이나 교회 내 요직을 보장함으로써 표를 얻어내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황직을 노리는 야심만만한 추기경들이 각기 교회 내 구축한 인맥과 사조직을 동원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졌다.

로마서 8:37 영화
▲미국 드라마 의 한 장면. 보르지아(교황 알렉산더 6세)는 교회 역사상 가장 추악한 콘클라베를 통해 교황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개신교회가 21세기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중세 가톨릭교회의 세속적 구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현실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면 앞에서, 기독교인 관객들은 실소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심정을 금할 수 없게 된다.

교단의 행태도 폭로 대상에 오른다. 원로목사는 후임목사가 설교 중 이단적 가르침을 설파한 점을 빌미로 교단 이단재판국에 심사를 신청한다. 이단재판국 측은 신학적으로 문제 있는 후임목사의 사상을 이단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면직권고를 제안하지만, 교회 실권을 잡고 있는 후임목사 측에서 교단 탈퇴 위협을 가하자 하루 만에 소명 기회를 주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이단적 가르침을 방지하는 것보다 교세 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교단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로마서 8:37>은 이 불행한 현실의 근본적 문제점이 교회정치 원리나 제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영화는 그 제도를 탐욕을 충족하고 죄악을 덮는 데 활용하는 목사 및 교역자들의 죄를 주목하게 한다. 진정 서글픈 점은, 양쪽 목회자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찾아낸 구실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점이며,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각자 실제로 지은 죄를 부인하고, 혹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더라도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양측 어디에도 진지한 회개의 심령은 찾아볼 수가 없고 오직 목회 주도권에 대한 탐욕과 자존심만이 가득하다. 이 둘의 싸움을 옆에서 회의적으로 지켜보는 노회 소속 김 목사의 대사는 부순교회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간에 벌어진 투쟁의 핵심을 단적으로 짚어낸다. "세상 싸움은 90%가 밥그릇 싸움이고, 10%가 이 자존심 싸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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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가에서 목회에 전념하던 안기섭 전도사와 김 목사의 눈에는 부순교회의 권력다툼이 단지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질 뿐이다.
한국교회 교회정치 원리는 교단 별로 크고작은 차이를 보인다. 장로교회 대부분은 앞서 밝힌대로 민주적 원칙이 강조된 장로회주의를 따르고, 감리교회는 관료제적 원칙이 강조된 감독주의 정치제도를 채택한다.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침례교회 등은 민주적 원칙을 강조하되 개교회에 배속된 권리와 책임의 범위가 장로교회나 감리교회에 비해 비교적 넓은 편이다. 특히 침례교회는 원칙상 각 개교회 신자들이 해당 교회의 모든 사안들(목회자 이취임 포함)까지 자치적으로 처리하는 회중정체(congregational polity) 원리를 따르려 한다.

이처럼 여러 교회정치 원리들이 존재하지만, 실상 어떤 교회정치 원리가 우월한지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교회정치 원리가 다른 것에 비해 덜 민주적이라 해서 무조건 강압적인 방식의 교회치리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덜 관료적이라 해서 치리의 안정성이 결여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특히 목사, 장로, 전도사, 집사들의 신앙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들이 회개의 심령을 잊은 채 교회 치리에 나서면, 교회는 즉각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목회의 직분을 권력, 재력, 영향력의 원천으로 보는 탐욕스런 우상숭배는 어떠한 교회라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독소로 작용한다.

지극히 원칙적인 고찰이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중대형 교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이 반성적 고찰을 일부러 무시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신앙양심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자행해 온 이 우상숭배의 죄악, 이것을 <로마서 8:37>은 진지하고 냉정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을 담아 본모습 그대로 보여 준다.

◈교회와 교역자: 담임목회자를 둘러싼 인(人)의 장막

<로마서 8:37> 속에서는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간의 쟁투와 함께, 후임목사인 강요섭 목사를 둘러싼 교역자들의 행각도 심각한 문제로 제시된다. 교회 내 청년부 자매가 속된 말로 '강(요섭) 목사 일빠'라고 부를 정도로, '스타 목사' 강요섭에 대한 교회 부교역자들의 충성도는 높다 못해 맹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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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자 회의실에서 강목사의 목회직을 지켜내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담임목회자 친위부대. 한국교회에서 빈번하게 관찰되는 목회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을 재현하는 배역들이다.
이들은 강요섭 목사의 성추행 의혹을 처음 들었을 때 그럴 리 없다며 부인했고, 사안이 성추행이 아니라 명백한 성폭행 범죄였던 것으로 확인되자 잠시 당혹감에 휩싸이나 이내 가해자인 강 목사를 두둔한다.

이들은 '목회자도 사람이고, 사람은 완전할 수 없고, 가끔 실수도 할 수 있다'는 클리셰가 되어 버린 변명을 들고 나선다. 그리고 강 목사의 성범죄 사실을 파헤친 교회 간사 및 청년부 전도사와 봉사자, 그리고 성폭행 피해자까지 회유하려 하고, 이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을 교회 내에서 매장하려 한다.

담임목회자의 명백한 범죄를 '실수' 혹은 '연약함'으로 바꾸어 놓는 부교역자들과 신자들의 행태는 특별히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회들 가운데서 자주 확인된다. 사실 교역자들을 비롯해 그리스도인들의 불의와 범죄를 '사람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무마하려는 습성에는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하는, 상당히 오래된 교의사적 기원이 존재한다.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는 18세기 초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이는 존 길(John Gill), 조셉 허시(Joseph Hussey) 등 일부 영국의 비국교도(nonconformist, 영국 국교회의 신앙 방침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던 개신교인들)들로부터 유래된 사상으로서, 칼빈(John Calvin)의 이중예정론(the doctrine of double predestination)을 극단적으로 강화한 신학사조였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개인의 구원과 유기는 태초부터 예정돼 있으며, 구원받기로 예정된 영혼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로 말미암아 삶의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받게 된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여기서 불가항력적 은혜와 성도의 견인을 보다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존 길 등은 불가항력적 은혜 가운데 자고하는 마음이 낮아지도록 하는 역사도 포함되어 있고, 이를 위해 성도의 견인 과정에서 성도로 하여금 결정적인 순간 죄를 짓도록 하는 역사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극단적 칼빈주의의 주창자들은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total depravity)라서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만일 구원이 예정된 이가 죄를 짓는다면 이는 사람이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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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영국에서 극단적 칼빈주의를 주창한 신학자 존 길(John Gill)과 조셉 허시(Joseph Hussey).
사실 극단적 칼빈주의에 내포된 원래 의도는 목사나 성도들이 짓는 죄에 대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 교계를 뒤흔들던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에 저항하는 데 있었다. 소시누스주의란 16세기 이탈리아 시에나(Siena) 출신의 천재적 신학자 파우스투스 소시누스(Faustus Socinus)의 사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소시누스는 사람의 이성과 자유의지의 힘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고, 그리스도는 단지 위대한 윤리적 모범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폴란드 형제단(the Polish Brethren) 혹은 유니테리언 교회(the Unitarian Church)라고 불리는 보수 개신교회들 입장에서 보면 명백한 이단이었던 교단의 창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소시누스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원조나 다름 없다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소시누스주의는 신학적 주적(主敵)으로 여겨졌다. 존 길 등은 소시누스주의가 강조하는 자유의지론 및 자발적 윤리론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으로 칼빈의 신학을 재해석했다.

소시누스주의와 여기에 대항한 극단적 칼빈주의는 당시 영국 비국교도 개신교회들에게 재앙을 초래했다. 소시누스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를 추종하던 교회들을 궤멸 상태로 몰아갔다. 구원의 복음이 아닌 윤리로 퇴락해 버린 소시누스주의 기독교는 세속의 정교한 윤리 이론들과 차별성을 갖지 못해 교회로부터 신자들을 내쫓는 역할을 했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칼빈주의를 추종하던 교회들을 빈사 상태로 몰아갔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전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데다, 목사나 신자들이 짓는 죄가 하나님의 뜻이라며 이에 대한 회개를 거부하다시피 했으므로, 여기에 염증을 느낀 교인들을 교회 바깥으로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목사들과 신자들이 극단적 칼빈주의를 아전인수격으로 악용했던 것이다.

이로써 18세기 초반 영국 비국교도 개신교계는 암흑기라 할 수 있는 시기를 보냈다. 이 사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강인한 전도 열정과 칼빈주의의 복음수호 의지를 조화시킨 존 웨슬리(John Wesley),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감리교 부흥주의가 등장하며 수습 국면에 진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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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섭 목사 한 사람의 죄악을 가리기 위해 부순교회는 모든 역량을 총동원한다. 이 과정에서 담임목회자가 저지른 죄악의 피해자들은 결국 교회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로마서 8:37>이 보여주는 강요섭 목사 친위부대의 행각은 18세기 초반 극단적 칼빈주의에 함몰된 영국 개신교인들의 행태를 그대로 재현한다. 다만 한국교회의 극단적 칼빈주의 성향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의도가 더 저급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영국의 극단적 칼빈주의는 자유주의 성향으로 치달을 당시 영국 개신교계에 경종을 울리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반면 한국교회 내부의 극단적 칼빈주의는 자신과 친분이 두터운데다 이익까지 보장해 주는 교역자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굳이 특정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현실의 교회들 내부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담임목회자의 헌금 비리, 편법적 후계자 옹립 문제, 신도 대상 성범죄, 그 외 여러모로 교회 내부에 심각한 물의를 일으키는 각종 비위가 논란이 될 때, 중대형 교회 부교역자들 가운데 다수는 맹목적으로 담임목회자 편을 든다.

영화 속 노회 아웃사이더이자 빈민가 목회자 김 목사의 말이 이런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 결국 모든 게 '밥그릇 싸움'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목사 친위부대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인물을 담임목회자로 옹립함으로써 직위 보전과 교회 내 권력에의 참여를 도모한다. 이를 위해 그들이 지지하는 목사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며 인(人)의 장막을 친다.

만일 자신들이 호위하는 목회자의 비리를 지적하는 등 위협이 가해질 경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은 교회 분열을 획책하는 '니골라당'으로 매도된다.

<로마서 8:37>은 한국의 적지 않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문제점, 즉 교회 내의 고질적인 '우리가 남이가'의 행태를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한편으로는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조명하고 있다. 영화는 교회 지도부의 죄로 인해 다수의 신자들이 고통과 미혹을 받는 현실을 한국교회의 암적 문제로 제시한다. <계속>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