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쪽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도 큰 의미를 갖는 것인가……

나는 혜자 언니를 보았다. 언니도 그것에 대해 특별히 더 기쁘다거나 기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나는 더 이상 혜자 언니네 가족의 쿡쿡 터지는 웃음소리를 엿들을 수 없는 것이 서운할 뿐이었다. 엄마도 없고 고등학생인 오빠도 늦게 와 늘 텅 빈 오후에 비록 방문을 사이에 두고 아슴푸레 들리는 두런거림이었으나 은정에게는 가족의 온기와 생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아줌마, 거기서 조금만 살다 다시 이사 오시면 안돼요?”

나는 공깃돌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의외로 아줌마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 되지. 여기로 다시 들어가라는 것은 망해서 오라는 건대.”

나는 거의 눈물이 터질 지경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그 웃음소리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또박또박 물었다.

“그럼, 우리가 아줌마네 옆방으로 이사 가면 어때요?”

그러자 아줌마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시다가 어깨를 다독여 주셨다.

“매일 와. 매일 학교 끝나면 우리 혜자랑 손잡고 우리 집에 와서 놀다가 숙제도 하고 그러다가 너네 엄마 오실 때쯤 집에 가면 되잖아. 어때 아줌마 생각?”

“와!”

혜자 언니와 나는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역시 어른은 생각하는 것이 우리보다 깊다니까, 그래. 이제 매일 언니네 집에서 노는 거야. 혜자 엄마는 이사 갈 집으로 떠나면서 혜자 언니에게 거기는 정신이 없을 테니까 여기서 데리러 올 때까지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후 내내 지루한 줄 모르고 공기놀이를 했다.

구리로 이사를 와서 새로 느끼는 감정이 있다. 혜자 언니가 다녀가면 언니네가 이사 가던 날의 슬픔이 되살아나듯 명치끝이 서늘해진다는 것이다.

언니가 가져온 부침개를 프라이팬에 다시 데웠다. 오징어가 든 김치전이다. 요즘 들어 불규칙한 식사로 살이 찌는 것 같아 기름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올리브유를 잔뜩 두른 팬에 김치전이 튀겨질 정도로 바삭하게 익혀 먹는다. 아무리 한 단지에 함께 산다지만 보통 부지런하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으리라. 나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탈진한 듯 문밖을 나가기가 싫은데 혜자 언니는 어떨 때 심지어 세 번까지도 온 적이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건강과 근면성을 가졌는가! 김치전 두 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맛있게 먹었다고 전화 한통 넣어 줄까…… 그만둔다. 한 번 잘못 붙잡히면 설교가 전화로도 30분이 넘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핸드폰 문자를 보낸다. ‘혜자 언니! 환상적 김치전 쌩큐!! 담에 내가 점심 쏠게. 신랑하고 현진이 현수하고 좋은 시간 보내시길!’

커피를 타는데 띵똥, 바로 메시지 수신의 신호가 울린다.

‘정말 안 갈 거야? X-마스도 얼마 안 남았는데…… 잘 자라, 울보 은정이.’

하여간 언니는 옛날부터 한 번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거엔 목숨까지 거는 경향이 있다. 나는 혜자 언니의 순수함과 고지식함이 정말 좋다. 내 인생에 미소로만 추억할 만한 것이 있다면 혜자 언니와의 공존했던 공간과 시간들뿐이다. 그 가족들은 내게 다정함이나 정직함, 성실 같은 미덕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

비록 지금 나는 마흔 살의 독신녀로 아무 관계에서도 그리 성공적이라 말할 수 없지만 깊은 내면의 켜켜이 틀림없이 혜자 언니네의 미덕들이 학습된 채 살아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언니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을 테니…… 아닌가…… 언니의 일방적 다가 섬일 뿐이었나.

오늘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다. 내일 오후까지 잡지사로 보내야 할 기사를 정리해야 한다. 겨울 다이어트에 성공하기. 여성지에 절대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이므로 색다른 구색으로 구성해야 할 책임이 있는 기사다. 좀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찾는 독자들로 인해 기자들은 모든 말초신경을 동원해야 한다. 기사거리가 시원찮으면 사진이라도 시선을 모아야하고 그도 저도 식상한 거라면 가장 충동적이고 원색적인 묘사로 가득한 뱀의 혓바닥이 되어야만 살아남는 것이 여성잡지사다, 그다지 건설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누구의 지적대로 공창이 사창을 견제해 주듯 일종의 본능적 요구를 대신해 주는 곳이 여성지의 기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나는 주제에 적격자들을 찾지 못할 땐 차라리 내가 한 20킬로그램쯤 체중을 불린 다음 한 달 만에 그것을 몽땅 빼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해 봤다. 못할 것도 없다. 최후의 에이스카드다. 다행히 이번은 나름대로 희귀한 주인공을 찾았다. 명상으로 살을 뺀다는 것이다. 절식이나 금식의 고통 없이 이 주일에 일 키로는 문제없다고 했으나 나는 직업상 ‘일주일에 2킬로 굶지 않고 단지 명상으로만 빼다’라는 호객적 제목을 달아 놨다.

인터넷을 켜기 전 커피를 들고 소파에 가 앉는다. 어차피 밤을 새워 작업할 거면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남미의 이과수폭포에 고정시킨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세계 최대의 폭포라고 알고 있었지만 오늘의 프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과수폭포 위의 밤 무지개였다. 밤 무지개라니…… 나는 집중했다. 무지개는 햇빛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란 상식의 습득은 한 번도 밤의 무지개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같은 상식을 배운 사람들에게. 그러나 무지개가 필요한 것은 햇빛이 아니라 적당한 습도의 물보라들과 단지 적당한 빛이었던 것이다. 제작자들은 많은 시도 끝에 짙은 코발트색 밤하늘에 보름달이 걸린 날 정확하게 밤의 무지개를 포착해 세상에 내보냈다. 즐거운 충격이다. 얼마든지 우리의 인생도 반전이 가능하다는 훌륭한 메시지를 읽어낸 자들은 행복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내 어두운 인생에도 무지개가 뜰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