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현재는 교회사아카데미의 대표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라은성 교수가 잠자고 있는 교회사의 면면들을 다시금 깨워냅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매주 목요일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잡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힘차게 박동하는 맥을 타고 생명의 기운이 흐르듯, 라은성 교수와 함께 역동하는 교회사의 맥을 짚어봅시다. -편집자 주

진리를 찾는 것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 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는 불변하며 영원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가운데 영원불변 진리를 알고 깨닫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인간다운 삶이요 참된 삶이라 확신합니다. 나 자신 이전에 진리를 찾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살펴보면서 진리를 찾아가는 나의 추구가 얼마나 바른 것인지 또는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혹 후회스러운 일은 아닌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신약성경 이후 수백 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기원후 64~312년까지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10차례에 걸친 핍박의 시기를 지냈는데 이런 혹독한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날로 확장하여 로마제국 전역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심지어 로마제국 군인들 가운데서도 기독교인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거했던 시기 로마제국 황제로 치리했던 도미티아누스의 친척들 가운데서도 기독교인이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의 15년째 치리시기에 로마의 총독들 중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의 아내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폰티아라는 섬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습니다.

도미틸라라는 여성은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질녀였고 그의 두 손자의 개인교수로 지냈는데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영지는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하여 숨고 지냈던 피난처가 되었는데 그곳이 유명한 ‘도미틸라 카타콤’로 불립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핍박받는 가운데서도 로마제국 내에 기독교가 퍼져나가고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진리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하던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질문은 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물었던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농담을 좋아하는 빌라도는 물으면서 대답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생각을 어지럽게 바꾸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하나의 신념에 고정되는 것을 속박이라 여기고 사고나 행동에 있어 자유의지를 즐기고 있다.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내고자 할 때 느껴지는 곤란과 수고만이 아니라 진리가 발견되었을 경우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를 속박한다고 여겨지기에 거짓말을 좋아한다는 것보다 거짓 자체를 선호하는 타락한 심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을 더하는 일은 기쁨을 증가시켜주는 것이 틀림없다. 만일 인간의 마음에서 공허한 의견이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희망이나 그릇된 평가나 멋대로 행하는 상상과 같은 것을 제거한다면 대체로 인간의 마음은 가난하고 시든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에 우울과 권태에 빠져 자신의 존재조차도 싫은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여긴다. 진리는 본래 자기를 판단하는데 있어 다른 기준을 좇지 않지만 그것에 따라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거나 또는 구혼하는 일이라고도할 수 있으며 진리의 인식은 진리의 현존이고 진리의 신념은 진리를 맛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의 최고의 선이다.”

사람들은 본래 거짓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복잡하고 고민하는 것을 싫어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은 진리 자체를 추구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무엇인가에 의해 속박을 당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거짓을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진리는 빛인데 그 빛에 비취지는 자신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빛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빛을 증오하리만큼이나 어두움을 선호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증오하는 것만큼 거짓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선택하게 되면 그것에 따라 살아가야 하기에 그러한 방종을 가상된 속박보다 선호합니다. 방종이 속박임을 깨닫지 못하고 가상된 속박이 참된 자유임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한복음 3:21)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거짓은 달콤하기에 기만적입니다. 헛된 자긍심을 갖게 하기에 일단 그것에 맛을 들고나면 벗어버리기가 어렵습니다. 마약처럼 그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이에 대해 베이컨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시키는 어리석은 개념들이나 경향들로부터 사람들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권합니다. 그것들을 그는 ‘우상들’이라 부르는데 네 종류의 우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인류에게 공통적인 민족의 우상, 개인에게 특별히 있는 동굴의 우상, 언어를 잘못 사용하는데서 비롯되는 시장의 우상, 그리고 권위를 부정하는데서 비롯되는 극장의 우상 등입니다. 이런 우상들로 인해 우리는 진리로 나오기를 또는 갖기를 꺼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민족의 우상’은 자신의 민족에게 있는 것을 우주적인 것으로 부적절하에 확장시키려는 편견의 형태입니다. 어떤 것들의 기준이 되는 것을 정해놓고 모든 것이 그것에 종속되어야 하는 우주적 기준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둘째 ‘동굴의 우상’은 자신의 문화와 사회 또는 자신의 선호에 속한 개념들을 부적절하게 확대시키려는 편견의 형태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또는 맹목적 애국주의 등이라 여깁니다. 자신이 다 옳고 다른 것은 부속으로 보는 경향입니다. 셋째, ‘시장의 우상’은 사람과 사람들 간의 교제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편견의 형태입니다. 사람들은 언어들을 사용하여 대화하지만 단어들이 대다수의 뜻에 따라 이뤄지기에 바른 것과 다르게 조성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극장의 우상’은 철학의 특별한 체제들에서 나온 여러 이론들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인각되는 편견의 형태입니다. 여러 가공된 세상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허상을 심어주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오류나 거짓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맛을 보려고 하는 그 어떤 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한한 힘에 의해 감동 또는 정동(情動, affections)을 받게 될 때 그 진리를 발견하게 이르고 그 발견으로 인하여 놀라운 기쁨에 이르게 됩니다. 이 기쁨으로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기도 하고 그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극단적인 경우에 이르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태복음 13:45~46)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부조리하고 어둡고 타락했다 하더라도 어두운 천년의 중세시대에도 진리를 붙잡고 고귀한 생명까지 바쳐서라도 지키고 전해주려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