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이스라엘, 다양한 집단 구성
역사적 자료 거의 없어 정보 부족
요세푸스 <유대 전쟁>으로 탐색
당대 상황 조명 유일한 직접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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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버츠(David Roberts, 1796–1864)의 ‘서기 70년,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파괴되다(The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Under the Command of Titus, A.D. 70, 1850)’. ⓒ위키
1. 들어가는 말

1) 정보가 부족한 예수님 당시 시대 상황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기원후 1세기 이스라엘 모습은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된 사회였습니다. 무엇보다 왕이 없었던 관계로, 이스라엘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습니다.

물론 대제사장이 어느 정도 지도자적 역할을 하였지만, 왕과 같은 실권이 없었던 관계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특징짓는 유대교를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하나님과 율법을 인정한다는 공통점 외에는 다양한 사상과 삶의 방식이 혼재하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밀한 ‘유대교(Judaism)’라는 것은 A.D. 70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끝난 다음 랍비의 조상인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된 후 형성된 단일화되고 체계화된 사상이자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완전히 분리된 종교로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라고 특정하여 부를 수 있는 이 유대교의 기원은 마카비 혁명(B.C. 167-164)이후 바리새인들이 구전 율법(Oral Law)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규정하면서 생긴 종교로,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신앙 생활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이전 이스라엘 상황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그룹들이 서로 경쟁하며 활동하던 시기로, 이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시대를 설명하는 역사적 자료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이 현재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자료들에 의지하여 추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약성경(특히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A.D. 200년경 바리새인들의 구전 율법을 집대성한 <미슈나(Mishnah)>, 그리고 요세푸스가 저술한 <유대 전쟁(Jewish War)>이라는 자서전적 전기가 이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주요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유대 전쟁사 요세푸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특히 요세푸스의 저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비록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직접적이고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를 “조국을 배신하고 로마에 항복한 반역자”로 낙인찍은 유대인들은 요세푸스를 경멸하였음은 물론, 그의 저술까지도 배척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를 알아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 책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1세기 당시 사회상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에 대한 정보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이 책이 전승되면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많은 내용이 오염 내지 왜곡됐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 책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들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1세기 당시 이스라엘 상황을 조명하여 주는 거의 유일한 직접적 저술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입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에세네파, 세례 요한 연관성 주목
열심당원, 무력 동원한 독립 주장
사마리안, 유대인들 상종도 않아

사마리아 토라 모세오경
▲사마리아인 랍비 야코프 벤 아론(Yaakov ben Aharon, 1896-1916)이 사마리아인들만이 사용하는 모세오경을 들고 있다. ⓒ위키
2)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을 기초로 예수님 당시 신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매우 다양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B.C. 4년 헤롯대왕 사망 이후 이스라엘은 외형적으로는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 로마의 이익에 따라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유다 지역은 로마 총독이 직접 통치하였는데, 이스라엘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이스라엘의 사상(철학)을 대표하는 세 개의 그룹으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그리고 에세네파를 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단 한 번도 언급되고 있지 않은 에세네파를 제외하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 그룹들이 역사에 분명하게 구분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하스모니아 왕가 형성 전후로, 그리스 셀루쿠스 왕조가 마카비 혁명(B.C. 167-164년)으로 가나안에서 쫓겨난 뒤, 이스라엘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중에서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제하는 실질적 자치기관인 산헤드린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 두 그룹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로 반대하고 경쟁하고 적대시하는 조직들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이 양대 산맥에 비해 소수파에 불과하였지만, 기독교 특히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연관성에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신약 성경에는 단 한 마디도 이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사해 문서 발견으로 이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 광야의 쿰란을 중심으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말세적 종교관을 가지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금욕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사다 열심당원 마카비 이스라엘 헤롯 멸망
▲열심당원이 최후 항전을 펼친 마사다 요새.
예수님 당시 1세기에는 이 외에도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소수 그룹으로 열심당원, 사마리아인, 헤롯당, 디아스포라 유대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기원이나 사상 등에 관하여 자세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여기서는 지면관계 상 열심당원과 사마리아인에 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고자 하였던 소수 그룹인 열심당원들은 율법과 유대 전통을 고수하고자 했던 그룹으로 “메시아가 와서 유대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을 무너뜨림으로써 메시야가 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열심당원들은 로마 제국 고위 관료나 장군들을 살해하거나 로마 제국에 협력하는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숫자에 비해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의 영향력은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는데, 이들의 선동적이며 호전적인 태도는 83여 년에 걸친 대공사가 진행되던 헤롯 성전이 A.D. 63년에 완성됨으로써 임박한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의 회오리 바람으로 몰아넣게 되었습니다. 전혀 전쟁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선동에 휘말려 로마와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초기에는 로마 군인들을 죽이고 예루살렘 성을 탈취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곧 강력한 로마 군대의 반격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성전이 불타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성이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자, 전쟁의 주동자였던 열심당원들은 유대 광야에 있는 마사다로 가서 약 3년 간 저항을 지속하다 결국 모두 자결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심산 사마리아
▲사마리아인들이 거주했던 그리심산 유적. ⓒ위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물과 기름의 관계를 유지하며 북이스라엘 땅인 사마리아 지역에서 살던 그룹입니다.

이들의 기원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 10지파의 멸망에서 시작됩니다. 앗수르는 점령지 포로들을 다른 지역 거주민들과 맞바꿔 살게 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포로들을 새로운 환경을 가진 장소로 보냄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의도였습니다.

북이스라엘 10지파 대신 이 지역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종교를 이어받아 유대교로 개종하였는데, 세겜에 있는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모여 살았습니다.

이들은 오직 모세오경만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며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관을 형성하였는데, 이런 차이로 유대인들과 서로 상종하지 않는 적대적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요한복음 4장 수가성 여인 참조). 유대인들은 이들을 “율법을 왜곡하여 잘못 지키는 자들”로 규정하고, “이방인보다도 더 부패하고 사악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의 대화는 물론 길에서 서로 조우하는 것조차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경우에도 비록 지름길이지만 사마리아 땅은 절대 밟지 않고, 훨씬 멀고 힘든 요단 계곡 길로 우회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됐습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구성된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다양한 그룹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그룹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도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 그룹들 중에서도 이스라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또 예수님의 복음 선포 중에 가장 많은 대립과 논쟁을 벌였던 두 그룹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계속>

프란체스코 하예즈 Francesco Hayez 예루살렘 성 성벽 함락 파괴 로마 제국 유대 전쟁사 요세푸스 이스라엘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 1791–1882)의 ‘예루살렘 성 함락(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of Jerusalem, 1867)’. ⓒ위키
류관석 교수
대한신대 신약신학
서울대 철학과(B.A.), 서강대 언론대학원(M.A.), 미국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M. Div.),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h. M. 구약 / M. A. 수료), Loyola University Chicago(Ph. D., 신약학)
미국에서 Loyola University Chicago 외 다수 대학 외래 교수
저서 <구약성경 문화 배경사>, <산상강화(마태복음 5-7장)>, <기적의 장(마태복음 8-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