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모습.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는 이날 양화진문화원 주최 이재철 목사와의 ‘인생’ 대담에서 60여년 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싣게 된 계기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 박사는 대담이 예정 시간보다 30여분이 길어진 가운데서도 “시시한 이야기만 듣다가 가는 게 아니라, 발표되지 않은 이야기 한 말씀이라도 듣고 가셔야 하지 않겠느냐”며 비화(秘話)를 꺼냈다. 그는 “(당시 담당 기자였던) 한운사 선생(방송작가·1923-2009)이 몇 가지를 이야기한 것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아무리 그래도 일간지가 고작 4면 나올 때인데 그 좁은 지면에 한 면 전체를 내줄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이어령 박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 명동에는 문인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문학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렸고, 당시 명동에서 활개치던 깡패·폭력배나 술집·다방 마담들도 문인이라고 하면 인정해 줬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는 학생이더라도 시인이라고 하면 가난했지만 대우를 해 줬다”며 “문인들은 돈 없이 외상이 가능했을 정도로, 이 대목은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동에서 ‘나비와 광장’으로 알려진 시인 김규동 선생이 모더니스트 시집을 내고 보기 드물게 칵테일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박사도 그 때 명동을 돌아다니다 참석하게 됐고, ‘이상론(李箱論)’ 발표와 당시 그를 가르치던 양주동 박사로 인해 이 박사는 문인들 사이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이에  김 선생은 이 박사에게 시집에 대해 덕담 한 마디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그 때 조목조목 따지면서 외국어를 사용한 부분을 지적하는 등 “진탕 욕을 해 버렸다”고 한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당시 한국일보 기자이던 한운사 선생과 만나게 됐다는 것.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 또 하나의 비화를 들려줬다.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가 발표되자 모두들 꼼짝 못한 채 ‘무서운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던 차였는데, 한운사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가 보니 이에 반박하는 글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읽어보니 함께 자취하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익명으로 자신에게 반박했던 것.

이 박사는 “실으라고 했는데, 한 선생이 ‘젊은이들끼리 치고 받으면 누가 좋아하겠냐’며 덮어두면서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미발표 원고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라며 “저와 가장 가까웠던 ‘문청’의 글이었던 사실에 허망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예술가들끼리는 굉장히 좋은 의미에서 라이벌 의식이 강하다”며 “예술의 세계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어서 양보나 우정이 없고, 외국은 이보다 더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는 정치와 경제와 달리 ‘언어 전쟁’, 실제가 아니라 언어의 게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실제 사회를 개혁하고 창조하는 분들에게 이런 의식이 있어서는 어려울 것”이라고도 했다.

또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은 가장 쉽게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창조는 항상 문학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현실에서는 ‘님’이 ‘남’이 되는 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지만 언어에서는 점 하나만 빼면 가능한 일이듯, 언어의 의미와 상징을 바꿈으로써 의식을 바꾸고 전체 사회를 개혁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령 박사는 마지막으로 “그런 점에서 ‘우상의 파괴’는 훌륭한 독립투사였지만 새 시대를 끌고 갈 리더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됐던 이승만 박사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며 “철없던 20대 한 청년이 던진 ‘우상의 파괴’가 단순히 문단에 파문을 일으킨 것만이 아니라 4·19를 불러오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면서 오늘의 자유를 가져오는 토대가 됐다면, 20대 청년이 한 그 일은 만용이 아니라 작은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제가 ‘우상의 파괴’를 쓴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