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실패 백성에 돌리던 지도자 모세, 하나님의 벌 지엄함 보여줘
하나님, 자칭 ‘열심당원’ 엘리야에 바람, 지진, 불 대신 ‘세미한 음성’
백성 중보·변호하는 지도자… 진영의 시대 속 리더, 선동 대신 포옹

엘리야
▲율리우스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의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다(Elijah kills the Ba'al priests)’.
2023년 새해부터 고대근동과 구약 성경 권위자인 단국대 김구원 교수님의 칼럼을 월 2회 연재합니다. 바벨탑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김구원 교수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 시카고대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고 개신대에서 가르쳤습니다. 일반인과 평신도에게 구약과 고대근동 문화를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김 교수님과 함께, 구약과 고대근동의 렌즈로 보는 신앙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이 모세에게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라고 명령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않고,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것입니다(출 4:1)”.

모세가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지도하기 매우 힘든 사람들이었다. 10가지 재앙과 홍해 속에 이집트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보았을 뿐 아니라 시내산에 불과 구름이로 강림한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온갖 불평을 하였다.

이것을 생각하면 모세의 대답은 거의 예언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탈무드에 전해지는 바(탈무드 <샤바트>, 97)에 따르면, 모세의 천리안적 대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실하며, 그들의 자녀들도 신실하다. 하지만 모세야, 정작 네가 마지막에 믿지 않을 것이다.”

사명 실패를 백성에게 돌리는 지도자에게 하나님의 벌이 얼마나 엄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 모세는 출애굽의 과업을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로 인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된다.

이처럼 탈무드는 백성들을 비난한 지도자가 엄벌에 처해짐을 교훈한다.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칭송되는 모세가 그런 운명에 처해졌다면,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엘리야에 대한 미드라쉬 해석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는 바알이 이스라엘의 국가 신이었다. 아합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바알의 제단과 신전을 건축하였다. 여호수아가 저주를 걸고 건축을 금지한 여리고 성도 아합의 시대에 재건되었다. 하나님 승리의 역사적 증거를 없애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살해당하거나 숨어 버렸다. 그 때 엘리야가 혜성과 같이 등장한다. 비느하스와 더불어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별한 ‘카나이(קנאי 열심당원)’로 불린다. 그는 우상숭배하는 아합과 북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가뭄으로 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 아무 벌도 내리는 것 같지 않자,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서 가뭄을 선포해 버린다. “내 말이 없으면(אם לפי דברי)” 사마리아에 가뭄이 수년 간 지속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이 ‘카나이’의 영성이고, 그가 엘리야 선지자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 특별하여 우상숭배자들을 보면 행동이 앞서는 선지자다. 그의 열심은 마침내 열매를 얻어,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여호와가 참 신임이 증명한다.

하지만 엘리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갈멜산 대결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이 엘리야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한다.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우 이상한 환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바람, 지진, 불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음성(קול דממה דקה)”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엘리야
▲주세페 안젤리(Giuseppe Angeli)의 ‘엘리야의 승천(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 1740)’.
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보려면, 이 이야기 전후에 삽입된 하나님과 엘리야의 대화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이 호렙산의 굴 속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 질문한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엘리야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카노 키네티)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후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앞에 섰을 때도 같은 대화가 반복된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카노 키네티)….”

엘리야의 대답에서 흥미로운 것은 엘리야가 스스로를 ‘열심당원’으로 소개한다는 것이다. ‘열심당원(카나이)’는 엘리야 때로부터 800년 후에 유다 정치에 등장하지만, “내가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라는 말 때문에 유대인들은 엘리야를 우상숭배하던 죄인들을 즉결 처분한 비느하스와 함께 열심당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열심당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무력적 정치를 통해서라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다는 계시를 받은 후에도 엘리야의 대답이 바뀌지 않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엘리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함으로써 그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하나님: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뭐하고 있느냐?
엘리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네 언약이냐?
엘리야: 그들이 주님의 제단을 훼파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네 제단이냐?
엘리야: 그들이 주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선지자들이 많다.
엘리야: 나 혼자 남았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책망하지만 말고, 그들을 위해 중보해야 하지 않을까?

미드라쉬 해석의 의미는 분명하다. ‘열심’이 있는 지도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도자들이 책망하는 자가 아니라, 중보하고 변호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엘리야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 유별하다”고 대답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미세한 음성으로 나타난다.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이 아니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엘리야는 다시 “열심이 유별하오니”라고 대답한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 뿐 아니라 다른 덕, 즉 ‘미세한 음성의 덕’이 필요하다. 이 사건 후 하나님은 촛대를 엘리야에게서 엘리사에게로 옮기신다. 엘리사가 새로운 지도자가 된다.

대립의 시대, 위기의 시대일수록, 진영의 시대일수록, 지도자들은 ‘카나이’처럼 되기 쉽다. 그들의 언어는 과격해지고 선동적이 된다. 이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도 있다. 진리가 선포돼야 하는 것처럼, 거짓도 꾸짖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꾸짖지 않는 것은 그것을 지지하는 것의 의미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도자의 덕의 전부는 아니다. 선지자는 죄인들을 꾸짖기도 하지만 보듬어 주기도 해야 한다. 즉 진리를 선포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진리를 어긴 자들을 품어야 한다. 물론 진리를 지키면서 동시에 그 진리를 어긴 자들을 품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영의 시대 리더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일이다.

엘리야 이야기는 종교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 죄 지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김구원 사무엘상
▲김구원 박사. ⓒ크투 DB
김구원 교수 저서

통독 주석 <사무엘상>과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쉬운 구약 개론(공저, 이상 이상 홍성사)>, <가장 아름다운 노래> 등이 있고, 역서로는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고대 근동 역사>,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이상 CLC)>,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출애굽 게임(이상 홍성사)>, <책의 민족(교양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