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구리시가 살기가 얼마나 편한지 서울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 천당 옆에 분당이라지만 너 거기서 전세로 백날 살아봤자 뭐하겠니. 애가 있어 학군 따지는 것도 아니고 달랑 혼자 살면서 걸릴 게 뭐 있니? 요즘은 예측 불허의 수명을 사는데 혼자 살면서 노후 대책으로 자기 집은 있어야, 하다못해 모기지론인지 하는 것도 이용해 볼 테고. 분당 그 전세거리면 여기서 28평은 넉넉히 사고도 남겠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내 말 좀 들어라.’

이렇게 전화를 걸때 마다 혜자 언니는 자기 아파트로 이사 오라고 채근했다. 언니가 모두 나를 위해서 오지랖 넓다는 눈치를 주었음에도 단념하지 않고 이사를 설득한다는 것을 안다.

혜자 언니는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셋방을 살던 가족의 장녀였다. 그때 우리 집에 방이 3개 있었는데 두 개는 우리가 썼고 나머지 하나는 혜자 언니네 4식구가 썼다. 언니와 나는 드나드는 대문이 달랐다. 나보다 두 살 위인 혜자 언니와 내가 같은 학교의 정문을 통과해서 손을 잡고 와서는 집 앞에선 나는 큰 파란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마루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고 혜자 언니는 칠이 벗겨진 나무 쪽문을 통해 바로 좁은 부엌이 있는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마루로 통하는 혜자 언니네 방문이 있긴 있었으나 그것은 한 번도 열린 일이 없었다. 마루에 있으면 혜자 언니네 식구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쿡쿡 터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끊이질 않았고 나는 아무도 없을 때면 그 문에 귀를 기울이고 엿듣곤 했다. 그 즐거운 가족은 우리 집에서 산 지 이 년 정도 되자 바로 윗동네에 있는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가 버렸다.

혜자 언니의 성화 반, 분당의 위선적 교양에 신물 반으로 나는 북한강이 가깝다는 구리로 이사를 왔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언니 말 듣기를 백 번 잘했구나 싶었다. 내가 아파트를 사자마자 28평 아파트가 거의 1억이 올라 버렸다. 교통도 생각했던 것보다 편리했다. 특별이 당일로 야외로 갔다 오기에 아주 적당한 거리다. 쇼핑센터도 여러 곳이 있어 언니 말대로 혼자 사는 여자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파트다. 그러나 한 가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을 줄이야….

혜자 언니가 제 집 드나들 듯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이었다. 물론 언니는 절대 몰지각한 사람이 아니므로 새벽이나 한밤중에 오는 일은 없다. 오전 11시쯤이나 오후 5시경 물김치며 부침개며 오이소박이 따위를 들고 와 한 20분 정도 있다 간다. 집안을 두루 살피며 혼자 사는 것이 어려움이 없도록 해주고 싶은 언니의 깊은 뜻을 내가 모른다면 정말 인간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직업이 소설가에 잡지사 프리랜서로 불규칙적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가족과 같은 혜자 언니일지라도 불시의 잦은 방문은 성가신 일이다. 더욱이 언니는 어느 날부턴가 소위 전도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은정아, 요번 한 번 만 가보자. 사람이 늙어 갈수록 신앙이 있어야 돼.”
“아니. 언니는 혼자 사는 사람 노후 보장으로 아파트 한 채 사게 했으면 됐지, 또 뭔 노후 대책? 아무튼 언니는 못 말려. 근데 아니 언제부터 교회는 다닌 거야?”
“어머, 얘 ,너 몰랐니. 너네 집에 살 때부터 다녔었는데.”

언니는 나의 등을 살짝 치며 상글상글 웃었다. 언니의 얼굴은 옛날하고 많이 다르지 않다. 동글반반한 얼굴에 동글린 듯한 눈썹, 동긋한 콧방울, 도톰한 입술, 모든 게 작고 가늘었던 나는 동글동글한 혜자 언니가 참 좋았다. 하교 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동그마니 앉았다가는 혜자 언니네 방문에 귀를 대면 들리던 밝은 웃음소리들. 주인집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소리를 늘 죽이며 소곤거리던 예의 바른 식구들, 나는 웃음소리가 그칠 때쯤 똑똑똑 신호를 보냈다.

“놀러와!”
“알았어!”

혜자 언니네 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얼른 마루를 내려가 마당을 한달음에 달려가 파란 대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엄마, 또 안 계셔?”
“응, 친할머니 병원에.”

기억 속에 친할머니는 몇 년을 병원에 계셨던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야 돌아가셨으니까. 그때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었다. 아빠가 돌아가셔도 여전히 시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는 엄마를 사람들은 효부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엄마는 우울했고 어느 날인가 부터 술을 마셨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난 나는 안방에서 스며 나오는 담배냄새를 맡고 아빠가 살아나셨나 하는 반가움에 문을 벌컥 열었고 그곳엔 아빠가 아닌 엄마가 술에 취한 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잠결이었고 아직 어린 아이였으므로 젊은 엄마의 고뇌 따윈 이해할리 없었다. 오줌을 누고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친할머니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병구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막내 고모로부터 들었던 것은 그 뒤 수년이 흐른 뒤였다. 나는 그저 매일 빈집이 싫었고 행복한 혜자 언니가 좋았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올 때까지 만화를 그리고 동화책을 읽고 미장원 놀이도 하면서 함께 놀았었다.

“그때 정말 몰랐어.”
“왜, 내가 주일학교에서 받은 거라며 스케치북이랑 색연필 자랑했던 거 생각 안나?”
“아. 생각나. 그 24색 색연필! 그랬었구나. 그래서 언니네는 그때 그렇게 행복했나 봐.”
“신은정, 나 그만 가서 저녁 해야 돼. 빨리 말해. 이번 주일 한 번만 가 줄 거지?”

언니는 아예 애원을 한다. 아마 나는 언니의 청을 물리치지는 못하고 몇 번을 따라 가 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는 안 된다. 산더미 같은 일감이 기다리고 있다. <계속>

창조문예 제공
김영미 작가(월간 《창조문예》로 소설 부문 등단, 《기독공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