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요리·향수·건축 발전에 기여한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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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우 칼럼] 르네상스(18)-카테리나 데 메디치

▲카테리나 데 메디치.

▲카테리나 데 메디치.

카테리나(Caterina de’Medici, 1519-1589)는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주도한 자다. 그날은 그녀의 딸이자 샤를 9세의 누이인 마르그리트와 신교도 앙리의 결혼으로, 오랫동안 싸우던 가톨릭과 위그노의 평화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위그노들은 드디어 찾아온 평화에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마치 콘스탄틴에 의한 밀라노 칙령의 소문을 듣고 어두컴컴한 카타콤에서 나온 로마제국의 성도들처럼.

그런데 귀빈으로 참석한 위그노의 지도자 콜리니 제독이 살해당한 것을 시작으로 무차별적 공격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긴 시간 동안 진행된 결혼식 축제에 지쳐 깊이 잠든 새벽에, 그 기회를 숨죽여 기다려 온 자들의 기습으로 인해 예기치 못하게 일어난 학살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위그노 교도들을 모조리 죽여라. 한 명도 살려 두지 말라.”

신교도와 가톨릭은 40년 동안을 싸웠고,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분리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샤를 9세의 명령으로 현장에서 3천 명 이상, 전국적으로 7만여 명의 위그노 교도가 목숨을 잃어야 했다. 결국 탁월한 장인들이었던 위그노들은 이런 재난을 피해 스위스, 화란, 영국, 프로이센으로 떠나, 프랑스는 국가적 큰 손실을 보게 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잔인한 명령은 카테리나를 악녀, 피에 굶주린 화신으로 여기게 했다. 이날의 비극적 사건을 애도하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조복을 입었고, 제네바는 금식을 선포할 정도로, 이는 개신교를 박멸하기 위한 추악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카테리나를 악마로 치부하는 것은, 그녀가 외국인이요 가문도 시원찮은 장사꾼이라는 프랑스 사가들의 차별의식도 한몫했다.

유년 시절

인간은 본능적으로 힘을 욕망한다. 그래서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온갖 꾀와 지혜를 동원한다. 이것이 세상 역사를 이끌어 온 동력이기도 하고, 또 인간의 민낯이기도 했다. 막강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점점 기울어 가고 있었다. 출중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가 세상을 떠난 후로 그만한 지도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는 인위적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카테리나는 우리비노 공작이나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 2세와 그의 프랑스인 아내인 미들렌 사이에서 1519년에 태어났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지 2년이 되던 해였다. 로렌초 2세의 할아버지는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고, 숙부는 면죄부 판매로 알려진 교황 레오 10세였다. 로렌초 2세는 교황 레오 10세가 메디치 가문을 재기하도록 지원함으로 피렌체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로렌초 2세를 위한 저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무남독녀로 태어났고, 그녀가 태어나고 한 달도 안 돼 부모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유약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죽음과 삶의 사이를 오갔기 때문에, 교황 레오 10세는 가슴 졸이며 그녀의 회복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대리자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교황이었으나 생명의 문제는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회복되었을 때, 그동안 힘이 되어 주던 할아버지 교황 레오 10세마저 세상을 떠났다. 후임 교황은 그녀에게 주어진 메디치 가문의 실권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숨죽이며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녀의 할아버지, 즉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서자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클레멘트7세)으로 등극함으로 극적으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실패했다고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녀는 비로소 할머니 알폰시나 오르시니와 교황 줄리오 데 메디치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친족 카테리나를 프랑스의 궁정으로 데려가고 싶어했으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정치적 이유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그녀를 로마로 불러 학문적으로 방대한 바티칸 도서관에 접근하도록 했고, 그녀는 그때부터 문학과 과학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지닐 수 있었다. 또한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을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고 한다. 차후에 도래할 실질적 통치권 행사를 위함이었는지 모른다.

정략결혼

클레멘트 7세는 카테리나의 결혼을 유럽 동맹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리치먼드 공작 헨리(헨리 8세의 사생아), 밀라노 공작 스포르차 등이
남편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의 왕 프랑수와 1세의 찬성으로 결혼은 성사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프랑스 신하들의 반발이 컸는데, 왕은 건강한 태자를 제치고 병약한 둘째인 앙리가 왕이 될 리 없다고 신하들을 설득하여 어렵게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다.

카테리나는 프랑스 왕의 둘째 아들 앙리 2세와 1533년에 결혼했는데, 두 사람은 14살 동갑이었다. 결혼식은 화려함의 극치였으나, 신랑은 신부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이미 정부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있었지만, 카테리나는 결혼 후 9년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러나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교양이 있었고 지적이었고 활달했다. 지리, 천문, 물리, 수학, 건축 등, 어떤 학문에서도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지지했던 왕 시아버지가 죽고, 왕권 계승자인 장남도 세상을 떠나게 되자, 남편은 예기치 않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카테리나의 불행은 이어졌는데, 남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는 남편보다 19살이나 연상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호하였다. 고로 모성애를 느낀 남편은 그녀를 어머니로, 또는 부인 또는 연인으로 여겼다. 그 여인은 기대하지 않던 왕자가 왕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카테리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발음을 트집 잡아 무시하기도 했고, 따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의지할 데 없는 카테리나는 오로지 묵묵히 운명에 순응할 뿐이었다. 그런 순박함을 알아차린 푸아티와도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속으로는 피가 거꾸로 솟기도 했겠지만, 그런 카테리나에게 동정심이 생긴 푸아티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법을 가르쳤다. 오랜 기다림이 결실했는지, 무정했던 남편이 아내에게 돌아왔다. 그동안 진국인 아내를 멀리한 것을 후회하면서. 그때부터 무려 열 명의 자녀를 낳을 수 있었으니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 싶다.

아이들은 대부분 어려서 죽었지만, 놀라운 것은 카테리나는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잡은 후에도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토록 자신을 멸시하고 핍박했던 푸아티에게 복수하지 않았고, 다만 앙리 2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뭇사람들은 궁중에 피바람이 불 것을 예상했지만, 카테리나는 그녀에게 편안한 노년을 보내도록 관용을 베풀었으며, 이런 행동은 궁정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한 경외심을 갖게 했다.

권력을 얻음

카테리나는 결혼한 후, 변함없이 남편을 사랑했다. 남편이 자신을 멀리할 때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편은 돌아왔다. 높은 학문적 지식으로 남편을 인정해 주는 아내에 대해 왕은 철이 든 것 같다. 그녀는 앙리 2세의 막후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 그녀가 열중했던 역사학, 철학, 정치학 등 막대한 양의 독서는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 후 1559년, 남편은 어이없게도 마상 시합 도중 떨어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상복인 검은 옷을 벗지 않음으로 지고지순한 여인의 본을 보였다.

남편이 죽자 둘째 아들 샤를 9세는 10세의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섭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카테리나는 똑똑했던 셋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위그노와의 전쟁은 더욱 치열했는데,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왕이 된 둘째가 신교도의 수장 콜리니 제독에게 심정적으로 가깝다는 점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왕위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왕권과 어린 자녀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모성애의 절박함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신교도의 살육을 묵인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자신의 어린 시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견뎌야 했던 고통을 자녀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는 절박감이 자녀들의 안전을 위한 모성애적 방어기제의 발동이 되었겠다 싶다.

그녀의 공헌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로 시집갈 때,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의 명문가였다.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으나, 찬란한 문화는 유럽 어느 국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술에 조예가 있었던 프랑수와 1세는 이탈리아 원정에 여러 번 참여함으로 이탈리아 예술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파리의 왕궁 건축을 의뢰함으로, 오늘날 파리가 예술의 도시로 변모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대학이 있어 학문적으로는 뛰어났지만, 문화 예술에 있어서는 피렌체의 르네상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카테리나가 왕비로 간택되어 프랑스로 갈 때 많은 요리사를 대동했고, 처음으로 왕궁에서 포크를 사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유명한 프랑스 요리가 태동했다. 또한 여인들에게 코르셋을 입도록 권장했고, 처음으로 향수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 시대 프랑스가 향수의 1등 국가가 된 것은 카테리나 덕분이었다. 또한 대규모의 건축과 남편의 기념관 건립에 직접 참여하였다. 위그노에 대한 방법은 잔인하였으나, 그 후로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녀가 자국인이 아니고 이탈리아 출신이었기에, 프랑스 역사가들은 차별적 시각이 강했다. 교황이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면 무시하고, 협조적이지 않는 것은 어제오늘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카테리나는 위그노 학살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대,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여장부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는 죽은 후 성당에 묻혔으나, 앙리 2세의 서녀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왕실 묘역으로 이장하도록 했고, 결국 앙리 2세 곁에 묻히게 되었다. 그녀는 인내하고 묵묵히 때를 기다림으로 거대한 프랑스를 통치한, 메디치의 걸출한 여인이었다.

로마한인교회 한평우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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