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성찬의 나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4-15)”.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 22:19)”.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에 외출 후나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으며, 손님이 오시면 먼저 그 집 하인은 손님들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은, 주의 은혜로 씻김을 받아 정결케 된 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의 종이 되어 겸손한 봉사를 해야만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깨끗함을 받은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단지 일상생활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부분적으로만 씻음을 받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겸손의 모범을 실천해 보이셨으며, 그 후 행하신 유다의 배반에 대한 예언, 그리고 고별 강론과 대제사장의 기도로 불리는 기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누가복음 22:17)”.
유월절 만찬에서는 네 차례 포도주 잔을 들었습니다. 주된 식사 뒤 마시는 세 번째 잔이 축복의 잔으로서, 이 잔에 해당합니다.
‘잔을 받으사’라고 하셨는데, 유월절 식사의 첫 순서는 감사기도를 드린 후 포도주 잔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행사를 관례대로 행하지 않고, 여기서 유월절 의식과 다른 특별한 행사를 하십니다. 이것이 성만찬의 기원이 됐다고 전해집니다.
우리 성도들은 매년 다가오는 부활절이 되면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틀에서 처형당하기 전날 밤 거행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성만찬은, 또 다른 신선한 시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열망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유월절 축제 기간 성만찬을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내 살이요, 이것은 내 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제4편 예배와 예식 제12장 성찬 3항에는 “모든 참여자들은 이 성찬의 예전에 준비된 떡과 포도즙을 나누는 가운데 그의 말씀과 성별의 기도 속에 영적으로 임재하신 주님을 뵙는 경험을 갖도록 하며 그의 새 언약에 새롭게 참여하면서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브랜트 피트리 박사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는 책에서 “만찬의 신비는 간단하다. ‘예수를 먹고, 예수가 우리의 밥이 되었듯,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밥이 되는 것이다’는 것을 만찬의 윤리라고 정의한다. 신비와 윤리 사이에 신학이 있다. 예수가 먹고 마셨던 마지막 만찬이 지닌 뜻을 온전히 밝히지 않는다면, 신비에서 윤리로 곧장 나아가는 것은 예수가 먹었던 그 만찬의 식감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그냥 씹지도 않고, 음미하지 않은 채, 꿀꺽 삼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직접 기념하라고 하신 유일한 명령인 ‘성찬’은 제자들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주신 것이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성찬은 상징과 실제라는 주제로 화합보다 분열을 만들어 내는 주제였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가장 민감한 주제인 성만찬’을 1세기 유대교 세계관에서 원의미를 친절하게 풀어냄으로 예수가 베푼 유월절 성만찬의 자리로 초청한다. ‘성만찬’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모르고 ‘의식’과 습관에 젖어 때가 되면 행하는 무의미한 ‘성만찬’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라고 피트리 박사는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며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십니다. 식사 후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자기만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자기만 부인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더라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만약 그랬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런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가 잠시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작동합니다.
우리 일상은 이른 아침 아이들이 학교에 가느라 분주하고, 부모님들은 일터로 가기 위해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준비물을 챙겨주며 “오늘 차 조심하고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하며 용돈을 챙겨줍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 뒷바라지가 끝나면 곧장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오늘의 할 일들을 점검하고, 삶을 위한 전쟁터로 나갔다가 일과가 끝나면 회사 동료들과 회식을 하거나 자신들의 취미생활이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즐깁니다. 하지만 정작 가족과 누리는 만찬과 가정예배를 지나칠 정도로 소홀히 하고 가벼이 하고 있지는 않나요?
모든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하루의 쉼을 위해 서로 위로하며, 하루에 일어났던 일들을 서로 소통하면서 반성과 더불어 참회의 기도와 찬송으로 말씀을 같이 나누는 가정예배가 살아 있다면, 이 사회는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세상은 연일 들려오는 험악한 소식과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가슴 졸이며 안타까워하는 시간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삶으로 오히려 죄를 범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기도 합니다.
가정을 외면하고 가정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은 가정은 물론이고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평안하고 화목하게 하지 못하는 성도라면, 성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가정은 곧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곧 사회이고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가정을 화평케 할 수 없다면, 그는 공동체 안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을 한다면 그는 위선자이고, 공동체를 범죄의 소굴로 만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살과 피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셨건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아닐까요?
성찬 때마다 주의 종의 축복기도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친히 머무신다는 믿음을 갖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고 느끼며 기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사랑과 은혜의 표현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삶의 충실한 표현을 통해, 다시 교회 안에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하는 기도와 찬송이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적인 만남을 원하시지만, 개인적인 만남도 원하십니다. 더 가깝고 친근한, 더 사랑할 수 있는 관계, 개인의 기도, 주님께 대한 개인적인 일치는 우리 기도와 예배를 완전하게 이끌어 주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직접 만찬을 거행하시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를 계속 하라고 하신 것은, 단순 반복이 아닌 언제 어디서나 당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는 단순한 믿음의 변화가 아니라 참되고 실제적이고 실체적인 변화가 돼야 합니다. 다시 말해 먹고 소화된 음식이 갖가지 양분으로 변화되어 살과 피가 되듯, 내 안에 모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으로 파견되는 것 아닐까요?
이로써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힘과 지혜와 용기, 영적 에너지를 충만히 공급받아 그 소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은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움켜진 손으로는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듯, ‘나’라는 존재가 가득차 있고 내 뜻만 고집하고 주님의 뜻에는 관심 없이 행동한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시점부터,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하셨던 최후의 만찬은 다름 아닌 공동체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 성찬의 예배를 나눔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보여 주십니다.
오늘 이 실제적 신앙의 신비를 더욱 뜻깊게 묵상하시기를 기도하며, 영적 통찰력과 믿음을 통해 신앙의 은혜가 깊어지도록 마음을 열어 이 땅 모든 분들의 신앙이 충만히 자라나길 축복합니다.
성만찬 예식에 먹는 포도주와 떡이라는 형식에만 의존하지 말고, 각자 달란트대로 사명을 실천하는 크리스천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비신앙인들도 어서 빨리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이 좋은 모습으로 세상을 향한 떡과 포도주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