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여리고성 가나안 기적 예수 맹인 시각장애인
▲그리스 출신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예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치시다(Christ Healing the Blind, 1570년대)’.
본문: 요한복음 9장 40-41절

눈 뜬 맹인과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주님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눈 뜨게 만든 사건에서 중요한 진리를 설파하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메시아의 위치에서 심판자로서의 입장을 보이십니다. 이 말씀을 듣던 바리새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반응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 본문을 배경으로 ‘우리도 맹인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1. 자신들을 지칭함을 인식했다
바리새인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절)”.

바리새인들은 주님 말씀에 인식을 보입니다. 맹인이 자신들을 지칭하신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함이니라”고 전하십니다. 그때 바리새인 중 몇 명은 주님 말씀을 듣고 “우리도 맹인이란 말인가?” 하고 스스로를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를 맹인으로 취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못마땅하고 부당하다는 심사입니다. 자기 인식과 함께, 분개하면서 반발성 질문을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감시하면서 주님 말씀과 행동을 관찰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유익과 기회를 이용하려 주님을 해하려는 의도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라는 질문은 헛소리가 아닙니다. 무의식 중에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했음을 알아차린 결과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현명하고 학식이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있는 그들은 무지한 평민들과 함께 취급되는 것을 큰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을 지칭함을 인식한 이유입니다.

2. 깨닫지 못하는 반응
주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반응이라는 말입니다.

40절에서 그들은 엉겁결에 자신들이 주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 말씀이 자신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주님 말씀은 영적으로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본다는 문제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해답이 이사야 42장 18에 나옵니다.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육신의 귀로 듣고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맹인은 육신의 눈이 감긴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주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에서 상대방 말을 듣고 나서 이해했다는 뜻으로 “I See”라고 답합니다. 그때 “I See”는 내가 본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했다, 알게 됐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맹인의 문제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가의 시각적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의 의미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라는 바리새인 질문이 깨닫지 못하는 반응의 증거라는 이유입니다.

3. 심판이 걱정된다
은근히 심판이 걱정된다는 말입니다.

40절에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질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는 약간의 불안과 걱정이 들어 있습니다. 앞의 “이 세상에 심판하러 왔다”는 말씀에 연계돼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질문은 자신들도 모르게 질문하게 된 무의식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이를 풀어서 표현하면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입니다.

그들의 반문적 질문에는 확신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진 걱정이 나타납니다. 심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하고도 공포스런 반문이라는 점에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런데 속에는 전혀 평안함이 없습니다. 자신들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억지를 부리면서 자신들의 양심을 덮어서 무마하려 합니다. 그렇게 해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죄에는 죄를 찾아내려는 ‘죄의 수사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에서는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죄 자체가 죄 지은 사람을 수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경찰이 검거하는 것보다도 스스로 자수하거나 자백하는 경우가 80%나 된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하고 질문할 때에 심판이 걱정이 되는 이유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4. 정리

사람에게는 3가지의 눈이 필요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육신의 눈, 글을 해독하는 정신적인 눈, 그리고 주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늘의 신령한 비밀을 깨닫는 영적인 눈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가는 인생 길에 영적인 눈이 밝아져 영생의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는 죄를 인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죄를 깨닫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죄에 반드시 심판이 따르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

전 한일장신대 교수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문의: www.kocpt.com
상담: 02-2202-3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