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웃음 천진난만 철부지 학교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 모습. (사진은 이 칼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픽사베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태복음 11:2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9-30)”.

‘철부지’란 사리를 분별할 만한 힘이 없는 어린아이 또는 사리를 분별하는 지각이 없어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는 총명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 줍니다. 이는 어린 아이들 같은 가난하고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위나 지혜 또는 물질로 인해 교만하거나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복음은 이렇듯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철부지 같고 어리석게까지 보이는 맑고 깨끗한 자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말씀해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란 유대인에게 적용할 때 의식과 율법의 무거운 짐에 눌려 고통 하는 자로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어려움에 처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죄인이나 고통받는 자를 뜻합니다.

특히 ‘멍에’는 무거운 짐을 나를 때 불편함을 줄여주기 위해 씌운 것으로, 순종과 책임의 수용을 상징합니다. 랍비들은 자주 ‘율법의 멍에’를 지는 일에 대해 말했으며, 그들의 지시로 그 짐은 무거워졌을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멍에는 가벼웠습니다.

이는 제자 됨에 대한 예수님의 부르심이 덜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우리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의 제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열쇠는 ‘내게로 오라’는 인격적 초대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는 누구일까요? 지금 시대나 당시 기득권을 가진 지방 관리들, 좀 더 가지고 좀 더 배우고 좀 더 오래 살았다고 어깨에 힘주며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자기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는 녀석이 뭘 안다고 나서서 떠들고 다니느냐?’라며 세속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란 누구일까요? 혹자들은 성경 속 ‘어린 아이’를 생각 없이 살아가는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원문의 ‘작은 이’ 라는 단어가 우리말로 옮겨지면서 철부지라는 뜻의 ‘어린 아이’로 번역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은 이’는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권력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세속적 가치나 소리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즉 ‘겸손한 사람들’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 ‘철부지’들은 세속 가치관에 빠져 살아가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교만한 자들로부터 조롱도 받고 손가락질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손수 뽑은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로 이 ‘철부지들’이기에,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되곤 합니다.

지금 나의 부족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 나아가는 통로가 됩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여기서 ‘결단코’란 어떤 경우라도 꼭 마음먹은 대로 반드시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 큰 자리, 명예와 영광을 바란다면,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엄마 아빠로 충분한 어린아이처럼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부귀영화와 명예 공명, 세상 영광을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듯, 오롯이 부모만을 의지하고 부모님에 대한 순수한 믿음으로 조금의 의심도 없이 100% 신뢰하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전적인 믿음’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거듭남이란, 예수님을 의심 없이 전적으로 믿고 회개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죽었던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씀하며, 이런 사람이 천국을 차지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때 아담과 이브는 부족함 없이 최상의 컨디션으로 동산에서 살아갔지만, 사탄의 유혹으로 절대 금기시됐던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류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에서도 탐욕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넘어지게 하는 안타까운 일이 지금 세상에서 버젓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원죄로 뒤덮여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 치열하게 험난한 길을 가야 하는 비극 앞에, 오롯이 주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길만이 놀라운 구원을 쟁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며 신음하는 병자를 고쳐주시며, 귀신을 쫓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며, 나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주린 자들에게 다가가 배불리 먹여주실 때는 수많은 인파들이 마치 주님 없이는 못살 것처럼 믿고 소리치며 열렬이 환호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가룟 유다에 의해 은 삼십 냥에 팔려 로마 병정들에게 잡히시고 고통과 고난을 친히 겪으실 때,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가장 믿었던 베드로마저 배신했으니, 주님 마음에 얼마나 상심이 크셨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 아니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한낱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변하는 것은 세상 이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처럼 부모만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리고, 근심 걱정 없는 세계에서 오롯이 배고프면 젖 달라고 소리치며 울고, 젖을 물리면 언제 내가 울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연거푸 지으며, 눈으로 입으로 표현하며 웃는 그 모습은 정말 천국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소리는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교회 안 지도자들은 그저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 교회 부흥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을 위해 양보할 것이 있으면 양보하고, 기독교 미래를 위해 그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정신을 더 높여 이 나라에 귀한 일꾼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과 행동으로 밀어줘야 하지만, 자신의 안일과 탐욕으로부터 오는 이기심 속에 주님을 근심케 하는 아주 나쁜 습관적인 지도자들이 우글대는 당회원들과 원로 장로, 은퇴 장로들 때문에 교회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어린 아이처럼 청순하고 철부지 같은 행동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주님을 믿노라면 언젠가는 실패의 소유자로 전략하고 말 것이기에, 믿음은 오롯이 단순하고 정직해야 함을 깨닫고 여생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주님 주시는 철부지 같은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큰 이슈가 되고 있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에 극한 반대하는 야당 때문에,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IAEA라는 세계 기구에서 오염수 방출이 안전하다고 판명하고 “오염수 방출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관점에서 이뤄졌다”며 “그 결과 우리 해역에 미치는 영향은 유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는데도, 야당 대표가 자신의 당과 사법 리스크, 내년 총선을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들을 우롱하는 처사입니다. 자신의 입지를 위해 무조건 반대하며 정치에 이용하려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국민들이 비판하는 목소리조차 잊은 채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고 이상한 정당이 아닐까요.

만약 윤석열 정부가 오염수 방출을 반대했다면, 그들은 유엔 기구에서 과학적으로 조사한 것을 반대한다고 시위나 데모를 하지 않았을까요? 머리나 생각 구조가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닐까 싶고, 21세기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고 거짓과 꾸밈이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몸부림치는 열정의 사람들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경쟁 속에서 이기기만 하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며, 세상의 지혜와 슬기가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지 비로소 깨닫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넘쳐날수록 더욱 각박해지고 사랑이 메말라 가는 현실 속에서, 어찌하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진정한 철부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의 돌부리에 넘어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사랑을 이미 무수히 받지 않았을까, 늘 묵상하고 감사하는 ‘철부지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