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영등포 광야교회
일시: 2023년 2월 19일
본문: 마태복음 5장 1-5절

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투 DB
오늘 마태복음 5장 1-5을 본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게 될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인데 제가 좋아하는 손영진 복음성가 가수가 와서 아름다운 찬양을 하고 제가 여러분들에게 세대별로 돈을 만 원씩 다시 드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가난과 고난”에 집중하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십자가의 특성인 “가난과 고난”의 "심령과 영성”을 지닐 때 우리들의 육성의 삶도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뀌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과 고난”을 귀중하고 아름답게 보고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2-3).

“가난과 고난”은 유익한 것이고 귀중한 것이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왜 “가난과 고난”이 유익하고 귀중하고 보배로운 것입니까? 우리 구주이시고 주님이신 성자 예수님의 삶이 “가난과 고난”으로 가득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곳이 없어서 말 구유에 태어나셨고 태어나시자 마자 애굽으로 피난을 가서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시기도 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심으로 극심한 “가난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당하신 “가난과 고난”의 귀중함을 지적하실 뿐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당하는 일반적인 가난과 고난의 귀중함을 아주 강하게 지적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6:20-23).

1. 사도 바울의 가난과 고난

첫째로, 사도 바울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따뜻하신 부르심을 받고 처절하게 회개한 다음 성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닮게 된 사도 바울의 삶은 “가난과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만큼 “가난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기술한 “가난과 고난”의 리스트는 아주 길고 다양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서 이렇게 길게 기술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자기가 당한 “가난과 고난”의 유익에 대해 이런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가난과 고난”의 극치인 십자가 만을 알기로 그리고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삽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만 자랑하고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지닌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 6:14,17).

2. 사도 베드로의 가난과 고난

둘째로, 사도 베드로가 지녔던 “가난과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마 사도 베드로만큼 “가난과 고난”을 싫어한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조만간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정식으로 반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성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자기를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3-25).

사도 베드로는 수 많은 실패와 배신과 좌절을 거친 다음, 디베랴 바다가에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면서 회개한 다음 앞으로는 팔을 벌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가난과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조금씩 조금씩 십자가의 길로 “가난과 고난”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결국 “가난과 고난과 시련과 불 시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십자가의 예찬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 4:12-19).

결국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과 함께 로마 세계를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너뜨린 초대교회의 가장 보배로운 순교의 제물들이 되었습니다.

3.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고난

셋째로, 성 프랜시스가 지녔던 “가난과 고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성자라고 불리는 성 프랜시의 삶이야말로 “가난과 고난”으로 가득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자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모두를 사랑했는데 “가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죽음” 까지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난과 고통”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 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고통을 몸과 영혼에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그를 맨 땅 위에 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4. 손양원 목사의 가난과 고난

넷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지녔던 “가난과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만큼 그렇게 극진한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산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나환자들을 극심하게 사랑하면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주어진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감사하며 살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대가로 피나는 “고문과 박해”를 당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을 당해서 죽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픈 비극”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이 총살을 당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습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양원 목사님은 밤을 새워 통곡하고 울면서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했습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양원 목사님은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습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습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습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습니다. 동희 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위대하시다” 라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습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정양순 사모님에게 있어서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은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습니다. 그 보석은 하늘에서도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면 한경직 목사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성 프랜시스의 영향이 손양원 목사님 에게도 미쳤다는 사실입니다.

5. 부족한 우리의 가난과 고난

부족한 우리들이 “가난과 고난”을 우리 몸에 조금이라도 지닌다면 우리들은 성자 예수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를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아주 조금은 닮을 수 있지 아니할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성 프랜시스는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자기 몸에 지니기를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평안과 안일과 부귀 영화와 장수를 추구하는데, 성 프랜시스는 그것들을 거부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부귀 영화나 고층 건물이나 고층 예배당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기 보다는 마귀가 가져다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짊어지는 것은 성자 예수님께로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고 성자 예수님을 따랐던 신앙의 선배님들에게로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부요함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마귀에게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짊어지고 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족한 우리들도 성자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셨던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모하면서 몸에 조금이라도 지닐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6. 결론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게 될 축복”아라는 제목의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게 될 축복"” 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면서 “가난과 고난”의 영성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추복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고난”의 영성을 몸과 삶에 지니고 사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가장 귀중하고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을 거부하거나 피해가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가난과 고난”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당하는 “가난과 고난”을 통해 조금은 겸손해지고 조금은 따뜻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가난과 고난”에 참여하게도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가난과 고난”을 당하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광야교회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주변의 건물들을 모두 허물어서 철거하고 대신 행복주택과 일반주택과 홈 타운주택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지금 극심한 “가난과 고난”의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교회와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분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서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가난과 고난”이 귀중하고 아름다운 축복이 되고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가난과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가난과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가난과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들을 모두 사랑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