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말, 러시아의 봄은 아직 이르다. 이제 곳곳에 눈이 녹으면서 삭막한 대지를 드러내고 있다. 기나긴 겨울동안 찬 눈과 얼음 덩어리를 가슴에 품고서 세월을 견디다, 이제야 자유롭게 태양과 바람을 쏘이며 감추어 졌던 본연의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 겨울의 맹렬함은 항상 도로에서 그 진상을 보여준다. 여기저기 움푹 패인 아스팔트이다. 저 구덩이에 차 바퀴가 빠지면 분명 발통이 튕겨 나가든지, 차가 뒤집어지든지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리저리 순간 잽싸게 피해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철렁 내려 않는다.
요 며칠 동안 모스크바 북쪽 내륙지방으로 800km를 올라갔다. 몇 개 교회를 방문하고 약물치료센터,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말씀을 나눈다. 때로는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공동의 메시지를 나누고, 어떤 때는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도전한다.
대부분 손님들이 러시아를 방문하면 대도시를 중심으로 짧은 시간으로 방문하기에, 이렇게 내륙지방 깊숙이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이는 오직 현장 사역자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혜인 것을 의식한다.
시골의 아직도 때묻지 않은 모습, 세상물정을 아직 모른다는 것과 더불어, 순수함을 지키고 있는 그러한 양면의 모습을 보면서 현장의 모습을 스케치해 본다.
마침 한 교회를 방문하니 토요일 오후 ‘축제의 시간’이었다. 교회는 화려한 장식과 함께 많은 축하객들이 꽃을 들고 선물을 들고 와서 점심을 나누고 있다. 알고 보니 그 교회 사모님의 40회 생일 축하 파티였다.
초청받은 사람들은 지인들과 성도들이다. 식사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사람들이 나와서 축하의 메시지와 노래와 자작시를 낭송한다. 이곳 전통이다.
그 동안의 지나온 삶을 격려하고 축복한다. 남편도, 자녀들도 축하노래와 메시지, 꽃선물을 하고 포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축하를 하게 된다.
시간을 보니 4시간이 지났다. 참 대단한 행사이다. 5년 혹은 10년 단위로 이렇게 축하의 시간을 갖는데, 온통 주인공을 위한 배려와 축하의 시간이다. 결혼식보다 더 화려하고 많은 선물이 들어온다.
필자는 언제 이렇게 해봤는가? 러시아에서 사는 덕분에, 지난해 아내의 배려로 함께 식사하면서 러시아 인들이 시도 읽고, 축하 메시지를 나누면서 경험했다.
그러나 두 시간을 넘지는 않았는데, 오늘 여기는 오후 내내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축하하면서 난 날을 기억하고 기뻐해 준다.
여기저기 몇 교회를 방문하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은 현장 사역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설교자의 영광과 희열을 느끼면서 행복 지수가 폭발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현장 사역자의 직분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것을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목회자들과 교제하면서, 현장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나누게 된다. 어느 러시아 목회자가 우리가 당면한 교회의 문제점을 말한다.
첫째, 목회자들이 만나면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이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매우 교만에 빠져있다는 소리를 한다. 대부분 러시아의 성향이 “목이 곧은 민족”이라는 것을 필자는 처음부터 느꼈다.
둘째는 교회 건물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 목회자는 한없이 코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동료를 내려다 보면서, 악수도 아랫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정도라고 한다.
셋째는 무슨 차를 몰고 다니느냐 라는 질문이란다. 이것이 러시아 교회 목회자들의 문제라고 말한다. 허허…,
가만히 듣다 보니,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이미 겪었던 일이 아닌가?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건강에 신경 쓰면서 헬스클럽이나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되고, 나아가 좋은 먹거리를 찾아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일이 아닌가?
역시 목회자가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교회가 안정이 되면 교만해지고 먹는 것을 찾아다니고 하는 것이 하나의 패턴화되어 있지 않는가? 물론 목회자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다 다르지만.
아직도 러시아 교회는 많은 곳에서 건축을 하면서, 셋방살이 신세를 모면해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아직은 타국이나 자민족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관심을 둘 상황이 아니다. 자기들을 세워가기에 바쁜 것이 대부분의 모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 역시 목회자의 배움이나 소명의식에 달려 있다. 어떤 목회자는 오백 명 모이는 교회인데 극장을 빌려 예배한다. 그럼에도 40개 이상을 개척하면서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곳이나 역시 목회자의 소명과 관심, 사역의 방향과 목회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3월의 마지막 주간인데도 함박눈이 쏟아진다.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폭설이 내리니 장거리를 앞두고 있는 마음이 급해진다.
차가 밀려 서 있다. 무슨 일이지 하는 순간, 대형 트레일러가 보란듯 한쪽 도로를 막고서 드러누워 있다. 아주 흔히 보는 일이지만, 우리 생명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한 동역자가 출발 전 안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운전은 습관적 과속, 핸드폰을 조작하며 운전한다. 나는 동역자를 향해, 안전을 위해 기도한 후에 그렇게 운전하면 그 기도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서 책망한다.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가 삶과 전혀 관계가 없는, ‘기도의 행위 속에 머무는’ 것을 본다.
이런저런 생각, 25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버린 현장을 살펴보며, 올바른 사역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와서 도우라’고 손짓하는 곳이 많다.
아직 기회가 주어졌을 때, 건강과 시간과 환경이 아주 좋은 이때에, 더욱 충성하여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변덕이 심한 러시아의 날씨, 언제 그랬나는 듯이 맑은 하늘에 햇빛이 쏟아진다. ‘와우… 전체 2,500km 정도 뛰었네~’.
이와 같은 때에, 러시아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슬라바보구(하나님께 영광)!”
세르게이 모스크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