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하나님 사용하실 ‘제2의 이승만’ 길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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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지저스아미 2024년 4월호 발간사] 런(Run)일성·권(Gun)승만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에 참관, 미국 측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假)조인식에 참관, 미국 측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관람자 수가 120만 명에 육박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재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많은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이승만에 대한 거짓된 내용들을 바로잡는 것이다.

“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통령이 저 혼자 살기 위해 먼저 도망갔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라’는 방송을 하여 피난 가지 않은 서울 시민들이 공산군에게 당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들이 만들어져 이승만을 공격해 왔고, 인터넷 보급과 함께 ‘런승만’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런’은 영어 ‘run’(도망치다)에서 따온 말이다. 어디서 이런 말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을까?

그들이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1950년 6월 27일 대국민 라디오 연설 녹취록 중에는 대통령 본인이 서울을 지키겠다는 말도 없고, 국민들에게 서울을 떠나지 말란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러면 누가 이런 거짓말을 만들어서 유포시킴으로 건국 대통령을 욕보이는 것일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국민 라디오 연설 전문 中(1950년 6월 27일 밤 10시)

지금, 우리의 원수들은 사방에서 중무장한 비행기와 탱크 그리고 군함을 몰고 와서 우리를 옥죄고 있습니다. …

무기도 없이 적과 대적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인들은 맨손으로 용감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결국 적군의 선봉대는 서울 외곽 수십 리 지점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한국의 리는 약 400미터 거리).

이런 상황을 보고 나는 워싱턴과 동경에 밤과 이른 새벽 시간에 전보와 전화로 연락을 취해 맥아더 장군과 통화를 했고, (워싱턴 주재 우리 대사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과도 통화를 했습니다. 내가 말한 바는 적이 우리 대문을 침입하는데,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

(현재 상황에서 국민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유력한 나라들도 이미 공산당 세력 수중에 넘어갔고, 일부는 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전차. ⓒ지저스아미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소련제 T-34 전차. ⓒ지저스아미

여기서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해까지 38선 전 지역 그리고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는 지역까지 적과 힘차게 싸우고 있는 우리 군과 경찰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의정부 지역에서) 무기도 없이 용감히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더욱 고맙습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용기, 힘, 결단력을 가지고 있음을 세계에 보여주어야만 우리는 그들로부터 지원을 기대하고, 남북한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는 모든 시민들이 전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하여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출처: 2024.3.24. 뉴데일리 「6.25 직후 ‘이승만 라디오 연설문’ 보니…“서울을 지켜라”는 말 없어」 ※본문 중 괄호( )는 영어로 번역된 미군의 감청문에 들어있는 것임.

반면 6.25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김일성은 한국군이 1950년 10월 1일 38선을 통과하여 북진을 시작하자, 압록강 너머 중국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도망갔다. ‘런(run)승만’이 아니라 ‘런(run)일성’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 젊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일까? 매우 수상하게 생각된다.

허위 조작된 사실로 런승만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세력들 가운데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간 젊은 런일성에 대해서 비판하는 자들이 있는가. 허위 조작된 수많은 거짓이 이 나라의 건국사를 도배질했다면, 이제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당시 75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낙동강 방어선이 흔들리는 위험한 순간에도 끝까지 한국 땅에 남아 있었다. 1950년 8월 중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것 같았고, 대구에까지 공산군 폭격이 확대되자 미국 무초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 제주도로 피신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무초 대사 앞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 대통령은 단호하게 “나는 한 발짝도 더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권총을 뽑아 들고 “공산군들이 내 관저에 침입하면 권총으로 먼저 프란체스카를 쏘고, 적군을 쏘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은 나에게 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초 대사는 너무 당황해서 황급하게 대통령 임시관저를 빠져나갔다고 한다.

▲1950년 10월 김일성이 중국땅 &lsquo;퉁화&rsquo;로 도주하면서 버리고 간 소련제 리무진. 국군이 노획한 이 리무진은 현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국회 사진전 &lsquo;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rsquo;. ⓒ국가기록원
▲1950년 10월 김일성이 중국땅 ‘퉁화’로 도주하면서 버리고 간 소련제 리무진. 국군이 노획한 이 리무진은 현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은 국회 사진전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국가기록원

1950년 8월 14일, 대구가 적의 82mm 박격포 7발 포격의 피해를 받자 무초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께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 이승만 대통령, 모젤 권총을 꺼내 들면서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프란체스카)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발로 나를 쏠 것이요.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출처: 6.25와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6.25 전쟁 비망록, 기파랑 출판사, 98쪽)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동안 290여 차례 전투 현장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요즘은 환갑잔치를 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오래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 이전만 해도 만 60세가 되면 환갑잔치를 많이 하였다. 조선 말 남성들의 평균 수명이 40세가 채 안 됐고, 1950년만 해도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이 50세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 3년 동안 75-78세였던 노(老) 대통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군인들을 직접 격려하는 전시(戰時) 연설만 279회 이상 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전쟁을 이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김명섭·김민식, ‘전쟁과 연설: 6·25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2022 봄호).

이승만에 대해서는 밝혀야 할 진실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도 ‘런승만’이란 거짓말은 더이상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면 안 된다. 대신 중국까지 도망간 김일성을 가리켜 ‘런일성’이라고 말해야 한다.

▲6.25 전쟁 당시 전선을 시찰하며 군인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75세가 넘은 고령의 이승만은 6.25 전쟁기간 290여 차례 전장을 직접 돌며 군인들을 격려했다. ⓒ국가기록원
▲6.25 전쟁 당시 전선을 시찰하며 군인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75세가 넘은 고령의 이승만은 6.25 전쟁기간 290여 차례 전장을 직접 돌며 군인들을 격려했다. ⓒ국가기록원

거짓된 역사를 가르치니 ‘헬조선’이란 말이 나오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말이 나온다. 말 전쟁에서 지면 나라가 망한다. 거짓과 허위가 이 나라를 장악하고 학교에서조차 거짓이 가르쳐지지 않도록 우리는 값을 치를지라도 진리와 진실을 외쳐야 한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잠 11:11)”.

이제 앞으로 우리는 ‘런(run)일성 권(gun)승만’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이 나라가 악인들의 입에서 나온 날조와 거짓으로 망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나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공적을 꼽으라고 한다면,

첫째는 극심한 혼란과 반대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다. 해방 후 남한에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원이 30만 명이 넘었고, 김일성이 북한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시켜 남파한 유격대원들과 간첩들이 남한 땅에서 활개를 쳤으며, 남로당 위조지폐 사건과 대구폭동 등으로 남한은 큰 혼란과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80% 정도로 국민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미혹되기 쉬웠다. 그런 상황에서 남로당원들은 소작인들에게 땅을 공짜로 준다는 소문을 내서 국민들이 공산주의를 지지하게끔 선전·선동을 하였다. 1946년 여름 미군정 여론조사 결과 당시 한국인들은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사회주의 70%를 지지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승만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북한 공산당과 남로당원들의 극심한 반대와 선전·선동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래서 온 국민에게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특별히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며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반면 북한도 허울 좋게 ‘인민민주주의’라고 헌법에 기재했지만, 예수 믿고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는 자유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독교를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장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국가기록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장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국가기록원

둘째, 6·25 전쟁 때 이 나라가 공산화되지 않도록 지켜냈다.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과 북한 공산당이 합작해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해 일으킨 6·25전쟁은 현실적으로 남한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적 능력과 애국심은 탁월했다.

그는 당시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하고, 워싱턴 D.C에 있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하여 그들이 최대한 신속하게 참전하도록 만들었고, 대한민국을 지키고 국익을 위하여 미국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버드 대학원 석사, 프린스턴 대학원 박사를 5년 반 만에 끝낸 이승만의 천재적 외교 능력과 6·25 전쟁 중에 목숨 걸고 나라를 살려냈던 애국심은 가히 놀라웠다. 망국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출한 이승만의 업적은 바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셋째, 1953년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게 함으로써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도록 국방과 안보의 초석을 놓았고, 이로 인해 한국은 놀라운 경제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단순히 미군을 주둔만 하게 한 것이 아니라, 서울 바로 위쪽이면서 휴전선 아래 있는 의정부와 동두천에 배치해 북한군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미군과 싸우지 않고는 서울에 진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서울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게 함으로써, 서울을 침공할 경우 미군과의 싸움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그 후 우리나라 종북 세력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할 뿐 아니라 어찌 된 일인지 정부에서조차 주한미군 기지를 각각 오산·평택 등으로 이전시킴으로 의정부와 동두천은 물론이고 수도 서울 방어와 안전이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력으로 당시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초강대국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미군을 국내에 주둔하게 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전후 미국의 한국 경제 원조에 관련된 협상 내용을 보면, 한국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과 협상을 추진할 때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익에 관해서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고 철두철미하고 악착같이 모든 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받아냈다는 것이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내용을 듣고 나서 “이승만 그 날강도에게 또 당했어”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소련제 T-34 탱크와 모터사이클 정찰대.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에 우리나라는 6·25 이후 전쟁 없는 70여 년을 보내면서 1960년대부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지금 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95년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경제발전을 잘한 나라로 한국을 선정했다.

또 한국교회는 전쟁 없는 70년 동안 크게 부흥했다. 해방 당시 남한 복음화율은 약 0.5%에서 20%로 증가했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 강국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 은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그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택해 우리 국민들이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전도하고 선교할 수 있도록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토대 위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셨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지켜주셨고, 6·25 전쟁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 없는 70여 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 주셨다.

19세기 말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길러냈다면, 이제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제2의 이승만’을 길러내야 한다.

이용희 교수
에스더기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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