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노트 16] 설교 표절의 ‘백신’
분명한 설교 철학 가진 설교자는
다른 설교나 책에서 통찰 빌려도
자신의 언어로 바꿀 수밖에 없어
청중에 알맞는 적용 다듬어낼 것
한동안 설교 표절은 한국 교회의 골칫거리였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설교표절 의혹과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측한다고 해서, 억측이라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근간에 ChatGPT가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목회자 데이터 연구소에서 ChatGPT로 설교를 작성하는 일에 대한 설문조사까지 발표했다. 거의 80%에 육박하는 설교자가 앞으로 설교 준비에 ChatGPT가 사용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어디까지 표절인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ChatGPT4에 창세기 1장 1절로 설교를 작성해 달라고 요청해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간략한 설교문이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설교원고를 작성해 주었다. 그것도 서론 본론 결론으로 명확하게 구분한 원고를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내놓았다.
한 번 더 충격을 받은 것은 ChatGPT의 글쓰기 수준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첨삭할 곳이 거의 없었다. 필요 없는 접속사나 모호한 문장을 찾아볼 수 없는, 꽤 근사한 수준의 글쓰기라는 점에서 깜짝 놀랐다.
목회자의 글쓰기 수준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좌절을 겪는다.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자칫 잘못하면 장황해지고 걷어내다 보면 논리성마저 사라져 버린다. 성경에서 길어낸 생각과 보화를 명료한 문장으로 만들지 못해 끙끙대는 것은 모든 설교자의 아픔이리라.
ChatGPT의 문장은 다소 기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실제 그 글만 따로 떼서 본다면 ChatGPT가 작성한 설교문인지 아니면 글쓰기에 관한 일정 수준 이상의 내공을 쌓은 설교자의 원고인지 쉽게 분간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교 준비에 ChatGPT를 사용할 설교자가 점점 더 많아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가볍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여기서 다시 질문이 생긴다. ChatGPT 활용은 표절이 아닐까? ChatGPT를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면 표절이 아닐까? 설마 그 글을 통째 사용할 설교자가 있을까 싶지만, 그 또한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주변에 설교 표절 문제로 곤혹을 치른 설교자를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 설교에 대한 중압감과 성도에게 좋은 양식을 제공하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이렇게라도 좋게 보고 싶다). 그렇다 해서 설교자의 설교 표절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질문이 생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표절일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주석을 참고한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읽기도 하고, 설교 영상을 보기도 한다. 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배운 것, 공부한 것, 독서한 것 모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표절의 영역으로 포함시킨다면 해 아래 새로운 설교는 하나도 없고, 모든 설교가 표절이며, 모든 설교자가 표절 설교자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젠 ChatGPT4까지 등장했으니, 표절 논란은 더 뜨거워질지 모른다.
핵심은 간단하다. 표절이란 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주석을 읽고, 강해서를 참고하고, 해당 본문과 관련한 책을 읽고, 해당 본문으로 설교한 설교자의 글을 읽고 영상을 보면서 메인 아이디어를 빌려올 수 있다. 어쩌면 ChatGPT4가 제시한 내용 중 일부에서 통찰이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설교 철학을 가진 설교자라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타인의 설교를 베끼는 일은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한 설교철학을 가진 설교자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나 책에서 아이디어와 통찰을 빌려와 자신의 언어로 바꿀 수밖에 없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청중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언어와 적용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분명한 설교 철학이 강력한 백신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설탕을 먹은 꿀벌도 나름의 꿀을 생산해 낸다고 한다. 설교자도 다르지 않다. 타인의 글과 아이디어를 빌려올 수 있다. 그것을 들이킬 수 있다. 분명한 설교 철학을 가진 설교자는 마치 꿀벌처럼 자신이 마시고 들이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와 생각과 마음을 담아낸 설교로 만들어 낼 것이다.
자신이 목양하는 청중이 다르기 때문에, 청중의 삶의 자리에 알맞은 적용으로 바꾸어 낼 것이다. 자기만의 이야기와 가치를 담아낸 설교로 바꾸어낼 것이다.
그렇다. 분명한 설교 철학은 설교 표절의 유혹으로부터 설교자를 지켜준다. 설교자의 분명한 설교 철학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를 보호하는 강력한 백신, 효과적인 백신이다. 모든 설교자에게 자기만의 분명한 설교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지혁철 목사
고창 잇는교회 개척
<설교자는 누구인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