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 칼럼 소개
인생은 힘들다. 그 가운데 비극이나 실망이 찾아온다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가 힘들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묻는다. 누구나 이 질문을 해본 적이 있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상황이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최근 칼럼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3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정서적 의심
내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거나 타인이나 교회에 실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감정적 의심이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하셨을까?”라는 말을 듣게 듣는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라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만일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신데 그 비극을 멈추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선하지시도 사랑이 많으시지도 전능하시지도 않거나, 존재하시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이는 질문하는 이의 마음에서 나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에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베드로전서 5:8)고 권면한다. 사탄은 기회만을 엿보며 “예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했다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집어넣는다. 이것은 지옥 구덩이에서 나온 거짓말이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을 할 때는 자기의 말로 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요 8:44)이다. 그러한 생각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을 아는 것이다. 마귀도 성경을 안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께 말씀을 인용했다.
2. 도덕적 의심
도덕적 의심은 누군가 특정한 종류의 죄나 중독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 경우이다.
어느 날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그녀에게 교회에서 자란 친구가 있는데 갑자기 이 친구가 하나님의 존재, 악의 문제 등을 질문했다고 한다. 나는 이 ‘친구’에 대해 그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종류의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 친구가 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친구의 반론은 전방위적이었다.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하나님을 떠나보내려는 것 같았다. 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에게 “때로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 앞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그분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마침내 “친구는 아들이고, 아들이 여자친구와 잤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들이 죄에 연루돼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원치 않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았고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는 대신 이러한 말을 해주고 싶다.
도덕적 의심은 권위로 귀결된다. 권위를 누구에게 두느냐? 하나님 안에, 아니면 자신 안에 둘 것인가? 도덕적 의심과 씨름하는 사람은 자신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한다.
3. 지적 의심
때때로 사람들은 예수와 부활에 대해 정당한 질문을 한다. 나도 그러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왜 그분이어야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마리아를 예수님의 동정녀 어머니로 선택하셨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이 많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래서 몇 년 동안 장기간 집중적인 성경공부를 하다가 신학교를 다니고 나서 답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강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나는 변증학을 공부했는데,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난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인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설득할 수 있는가? 여기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 부모님이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가 가족의 전통이기 때문에 내가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인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독교는 참된 것이다.
상황에 따라 정당한 질문이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이고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것이 기독교를 참되게 만든다.
성경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기록을 제공한다. 코넬리우스 타시투스, 루시안 오브 사모사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지만 예수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역사적 기록에 대해 쓴 소수의 역사가였다. 예수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성경 기록이 사실이라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예레미야 17장 9절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한다. 누가 알 수 있는가?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련이나 비극을 겪을 때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위험하다. 감정은 반드시 우리를 진실이나 최선의 결정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고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성경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안다면, 감정으로 생각하고 비판적 사고를 사용하는 대신, 감정에 따라 평생의 결정을 내리는 대신, 필요할 때 그 약속을 마음에 불러올 수 있다. 우리의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믿든 말든 역사는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상황에 의존하지 않는다. 부활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주장은 우리의 상황에 관계없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