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 다시 보기 30] 부모교육, 부모다운 부모로 성장하기 (4)
자녀들에 숨 쉴 공간 마련해 줘야
나쁜 짓 아니면 넘어갈 때 있어야
다 알아야 한다면 사랑 아닌 집착
관계 여백, 하나님 역사하실 공간
자꾸 개입, 건강하게 자라지 못해
의지하나, 너무 기대지 않는 거리
조언하나, 선택 강요는 하지 않기
기대면 추락 위험! 손대지 마시오
#낄끼빠빠, 하나님의 자리를 만드는 공식
“목사님 너무 숨 막혀요. 우리 엄마는 저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나 봐요. 제가 누굴 만나는지, 무얼 먹는지, 심지어 오늘 교회에서 무슨 말을 누구와 했는지도 물어봐요.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저를 못 믿어서 그러는 건가?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한 아이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부모로 인해 고통받는 자녀들이 많다.
‘낄끼빠빠’. 우리 아이들이 잘 쓰는 말 중에 하나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의 줄임말이다. 인간관계에서 최고의 명언 아니겠는가!
물론 교회에서도 그렇겠지만 사회에서 낄끼빠빠가 잘 되면, 절대 ‘꼰대’란 소리를 듣지 않는다. 꼰대란 참견할 곳 안 할 곳 다 참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회나 교회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적용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낄끼빠빠’가 중요하다. 자녀에게 관심을 표현한답시고 모든 것을 다 묻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적당히 자녀에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나쁜 짓이 아니라면 적당히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정혜신 박사는 《당신이 옳다》에서 이것을 ‘심리적 조망권’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정혜신 박사의 설명을 잠깐 들어보자.
“자신의 경계가 뚫려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내가 타인의 경계를 마구 침범해서 마구 짓밟고 훼손하고 있으면서도 그걸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둥 진심을 몰라서 답답하다는 둥 자신이 피해자인 줄 착각하는 경우도 흔하다. 본인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부모들이라면 정혜신 박사의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아가 집착일 수도 있다.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사랑은 그 사람의 최선을 믿어주는 것”이라고.
사랑한다면, 거리가 필요하다. 필자는 물건을 살 때 꼭 한 번은 멀리서 쳐다본다. 가까이서 보면 그 물건만 보인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사려는 물건과 물건이 놓일 주변을 생각해 본다. ‘잘 어울릴까?’ ‘공간에 잘 맞을까?’ 주변의 조화를 생각해 본다. 멀리서 봐야, 거리를 두고 보아야 실패가 없다.
물건만 그럴까? 아니다. 관계도 그렇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에도 적용된다. 가까이에서 항상 거리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관계는 실패하게 된다.
‘여백의 미’는 관계에도 적용되는 중요한 기법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특히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우리 아이의 인생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김도인 목사가 《나만의 설교를 만드는 글쓰기 특강》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앙생활은 자리 채우기가 아니라, 자리 비우기다. 인간의 욕망 채우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 비우기다. 인간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 만들기다. … 힐링은 채움이 아니라, 비우는 과정에서 생긴다.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가 생길 때, 비로소 힐링이 시작된다.”
필자는 이 말이 비단 신앙생활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관계,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적용이 된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채우려 하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서로의 관계를 어그러트릴 뿐이다.
반면 관계의 비움, 관계의 여백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또 다른 공간이 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녀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맛볼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자녀의 전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부분에서 비집고 들어오실 수 있을까? 결국 부모가 자리를 빼지 않으면, 하나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낄끼빠빠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리도 생긴다’. 오늘 이 말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적당한 거리를 두고자 한다면, 이 말처럼 짧고 효과적인 말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워보자. ‘낄끼빠빠’!
#(부모에게) 기대면 추락 위험, (자녀에게) 손대지 마시오
오늘 아침에도 보았다. 필자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이 문구를 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이 문구를 보았을 것이다.
김덕년 교장이 지은 《포노 사피엔스를 위한 진로교육》에 보면, ‘수민’이라는 학생이 이 문구를 보고 새로운 경고문을 만들었다.
(부모에게) 기대면 추락 위험
(자녀에게) 손대지 마시오
원만한 관계를 위하여
앞의 선을 넘지 마시고
위험한 행동은 삼가길 바랍니다.
깊은 울림을 주지 않는가. 우리는 선을 너무 자주 넘는다. 거리를 지키지 않고, 자꾸 손을 대려고 한다.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에 보면, ‘선숙’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녀와의 관계를 망쳐버린 엄마다. 그런데 《불편한 편의점 2》권을 보면 너무도 달라진 선숙의 모습에 놀라게 된다. 아들과의 관계가 너무 좋아진 것이다. 그녀의 비법을 들어 보자.
선숙은 이제 아들을 닥달하지 않는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고시 같은 걸 보라고도 하지 않는다. 결혼하라는 말도 안 하기로 했다. 아들 세대 앞에 놓인 세상 형편이 자신이 젊을 때의 기준과 다르다는 걸, 아들의 설명을 듣고 인정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자신과 분리되려는 아들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이제 서로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거리를 지키게 되었다.
비결은 ‘거리의 인정’이었다. 적당한 거리, 서로에겐 차이가 있음을 인정했다. 기준이 다르기에,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들의 삶에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아들과의 관계가 좋아진 비결이었다. 정신과 의사인 한성희는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에서 말한다.
모든 관계에는 건강한 거리가 필수적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각자 독립적인 심리적 공간이 확보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관계는 겉으로는 끈끈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해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무엇보다 거리가 필요하다. 이 거리를 무시하고 자꾸만 자녀의 인생에 개입하면, 결국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착륙과 추락, 과정은 같지만 결과는 천양지차다. 비행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같다. 착륙은 비행기가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는 것이 착륙이다. 안전하고 행복한 결말이다.
그러나 추락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오는 것이다. 사고이고 재난으로 귀결된다. 자녀는 자신의 의지로, 원하는 곳에 착륙해야 한다. 자녀가 인생이란 항로를 운항하면서 비자발적으로 내려오면, 착륙이 아니라 추락임을 기억해야 한다.
적당한 거리가 좋다. 서로 의지하지만, 너무 기대지 않는 거리. 서로 조언해 줄 수 있지만,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 거리. 자녀의 관계 거리는 어디쯤일까? 다시 한 번 그 거리를 생각해 보는 하루는 어떨까? 다시 한 번 기억하면 좋겠다.
주의! (부모에게) 기대면 추락 위험, (자녀에게) 손대지 마시오!
김정준 목사
울산대흥교회 교육목사
영남신학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한남대학교 대학원 박사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