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 기독문학세계] 사랑의 데이터
인공지능·빅데이터에 대한
불편과 불안이 위로가 되다
예술을 창조한다? 잘못된 말
비너스, 자궁의 그림자일 뿐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같은 말들은 오래 전부터 떠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미래의 모습으로 일반인들에게 체감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고,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 새로운 기술들은 전문가들이나 전공자의 영역이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불안하였다. 불편함은 신기술의 발전에 뒤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며, 불안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나 신의 영역이 기술의 발전으로 침범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던 얼마 전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분야를 매우 쉬운 언어로 설명한 신간 한 권을 받았다. 책은 ‘좋은습관연구소’에서 펴낸 <데이터는 예측하지 않는다(지은이 김송규(Amang Kim) 교수, 마카오 폴리텍대학교 컴퓨팅 전공)>였다. 책의 제목 위에는 ‘데이터에 관해 꼭 알아야 할 오해와 진실’이라는 부제와 함께. 뽑아 쓴 글은 ‘인문학적 소양의 중요성’이었다.
‘데이터’라는 용어는 나와 관련이 없는 듯 여겨졌으나, 빅테이터나 인공지능을 이해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검색해 보았다.
출간 두 주 만에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 여러 곳에서 책을 다루고 있었다. 2쇄가 E–Book으로 출간 중이었다. 추천사는 전문 분야의 교수들과 금융계의 디지털혁신단장이었다. 그러나 서평과 독후감은 주로 일반 독자인 듯하였다.
이런 연유로 나는 부담감 없이 책을 펼쳤는데, 놀랍게도 이 책을 읽는 데는 불과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빅데이터나 인공지능에 관한 책이 비전공자인 나의 손에서 단숨에 읽혔다는 사실을 독자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재미있게 잘 쓴 책이었다.
이 글에서 나는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에 대한 나의 불편함과 불안이 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면 관계로 책의 내용을 세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으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 자신의 정리 부분을 소개한다.
“…데이터 사이언스도 인공지능도 흘러가는 세월이 바뀌면 함께 발전하는 최신 기술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데이터 사이언스 도구를 최신인 양 모두 습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따라가지 못한다고 불안해야 할 이유도 없다. 데이터 사이언스는 의사 결정을 돕는 여러 최신 기술 중 하나일 뿐이고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생성형 인공지능 또한 스쳐 지나가는 최신 기술일 뿐이다.
그리고 최신 기술은 지금 내가 혹은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일 뿐이다. 도구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나에게 달려 있다. 나의 통찰과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목적으로 무엇에 그 도구를 쓸 것이냐를 결정한다(<데이터는 예측하지 않는다> 220쪽)”.
책은 이 ‘정리’에 독자가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기술도 언제 어떻게 진화되어 지금의 챗GPT가 구닥다리 기술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복잡한 수식과 난해한 이론이 전혀 없이 아주 쉽게살명해 준다. 저자의 경험을 통한 설명이기에 설득력이 크고 재미가 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유익(물론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다)은 내 신념 하나가 더욱 명쾌해진 점이다. 데이터란 세상에 있는 존재, 일어난 사건, 어떤 순간의 상태 등을 사람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지 않도록 해석을 고정하려고 애쓴 정보이다. 이러한 데이터를 모으려면 그 값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상의 실체가 불분명해서 측정이 불가능한 것이 있다. 사랑이나 생명, 성, 영원 같은 것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들이다. 측정이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측정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대체지표인데, <데이터는 예측하지 않는다>의 저자는 대체지표로 측정된 것을 가짜라고 했다.
책은 그 이유를 학문적으로 설명해 준다. 나는 공감한다. 동시에 평소의 내 신념 하나가 과학적 근거를 얻은 듯하였다. 바로 성경 전도서 10장 3절 말씀이다.
그렇다. 생명이나 창조성은 물론 ‘사랑’도 데이터나 알고리즘으로 그 분량을 측정할 수 없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다루는 사랑이라는 주제의 작품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 수준의 작품을 만들 수는 있다. 독자가 좋아하는 사랑 노래를 만들 수 있고, 대중이 선호하는 사랑의 오브제를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하나님의 본성의 모방일 뿐이다. 예술을 창조한다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창조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며, 예술은 그 모방일 뿐이다.
젊은 시절 루브르 미술관 ‘밀로의 비너스’ 상 앞에서, 나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밀로스인들은 생명의 개선문을 여기에 세우고 우아의 영역에 찾아와 무릎 꿇게 하였지만 비너스는 자궁의 그림자일 뿐이다. 붓과 정열과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 사람들은 언제나 그림자 앞에 무릎을 꾼다(영한 시집 <자궁의 그림자> 22쪽)”.
송영옥 교수
영문학 박사, 기독문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