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피테르 드 호흐
일상 행위서 가정의 행복 예찬
그림 감상하면 입가 미소 번져
실내와 실외 물 흐르듯 통합돼
가정 중시한 교회 가르침 작용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은 자신의 화면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화가 자신도 그리는 사람들에 호감을 갖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불변의 정신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였다.
피테르 드 호흐(Pierter De Hooch, 1629-1684)의 경우, 풍경화가 니콜라스 P. 베르켐(Nicolaes P. Berchem, 1620-1683)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정작 풍경화의 영향은 크지 않았고 주로 실내 인물화를 그렸던 로테르담 화가 헨드릭 소르그(Hendrik Sorgh)의 화풍과 유사점이 더 많다.
드 호흐란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시기는 1654년 델프트에서 활동할 무렵이었다. 그는 이 시기 자네체 반 데르 버치(Jannetje van der Burch)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고, 카렐 파르리투스(Carel Fabritus)와 니콜라스 마스(Nicolas Maes)로부터 인물화를 익혔다. (두 화가 모두 렘브란트의 스튜디오 출신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수학한 뒤 델프트에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인물 화가들과 가까웠던 것으로 미루어 그는 나이 삼십 대 들어 자신의 작업 세계에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파악된다.
피테르 드 호흐의 작품은 크게 두 시기로 분류된다. 델프트 시기와 암스테르담 시기이다. 가정을 테마로 일관되게 그림을 그렸지만 델프트 시기에는 소박하고 정겨운 가정의 모습을 그렸다면, 암스테르담 시기에는 좀더 교훈적이거나 비판적인 메시지를 동반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암스테르담 시기 그의 화풍은 헤라르드 테르보르흐(Gerard ter Borch)처럼 좀 더 세련되고 세밀하게 표현된다.
드 호흐의 화풍은 때로 네덜란드 장르화의 특징처럼 게임을 하거나 흥겨운 음악 연주나 음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이보다 혁신적인 것은 집안일을 하는 여인, 어린이를 돌보거나 하녀와 함께 있는 여인, 음식을 준비하거나 아이들을 양육하는 어머니, 음식 보관소에서 주전자를 건네주는 어머니 등 가정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줄거리로 한다.
드 호흐는 일상적 행위에서 얻어지는 가정의 행복을 예찬하는 데 초점이 모아진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은, 등장인물이 친근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화가는 이런 주제를 순화하고 고양시키는 화법을 개발하면서 삶에 대한 긍정성을 나타냈다.
그의 화면은 대략 실내와 안뜰이 연결되는 구조를 하고 있는 것, 실내만 모티브로 한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모든 장면의 디테일까지 살려내면서 그 위에 여성과 아이들을 배치시킨다. 특히 실내와 실외의 연결을 그만치 자연스럽게 구사한 화가도 드물다. 반대로 말하면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흐려지며 실내와 실외가 물 흐르듯 통합된다.
가정에 대한 주목은 의심할 바 없이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 가정의 신성함과 중심성과 관련이 있다. 크리스토퍼 브라운(Christopher Brown)이 말하였듯, 네덜란드 개신교 공화국에서는 가정이 신앙 교육에 있어 주요한 장소가 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가족의 양상도 바뀌게 되었는데, 중세 대가족이 점점 더 작고 친밀한 핵가족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드 호흐의 정돈된 공간은 가정이 갖는 중요성을 완벽하게 보완했으며, 빛이 가득한 창문과 바깥으로 연결되는 출입구는 가사와 양육을 위한 편안한 구조를 제공해준다. 이 외에도 여성에게서 엿볼 수 있는 평온함과 아이의 시선, 그리고 청결한 실내와 빛에 잠긴 안마당 등은 모두 가정의 예찬과 연결되어 있다.
츠베탕 토도로프(Tzvertan Todorov)는 드 호흐가 여성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내밀한 공간에 신성미를 부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네덜란드를 여행한 영국인 조셉 쇼(Joseph Shaw)는 네덜란드 여인들에 대해 “그들은 연인들을 매료시키기 위해 애쓰기보다 경건, 좋은 성품, 순수, 진실, 고결함과 같은 바람직한 성정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고 소감을 피력했으며,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공화국의 저력과 행복의 주된 이유’라고 분석하였다.
로테르담 개혁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드 호흐가 가정을 주제로 그림을 제작하게 된 배경에는 교회의 가르침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목회자 야코부스 꿀만(Jacobus Koelman)의 저술을 보면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으리라 본다.
꿀만의 『부모의 의무들』은 당시 출간된 부모 역할에 관한 몇 안되는 지침서로, 이 책에서 저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부모와 자녀의 상호 의무를 다루었다. 저자는 여기서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외우기, ‘위대한 성경 이야기’ 들려주기, 매일 ‘하나님 말씀’ 읽고 암송하기, 또 ‘자녀가 존경하는 부모 되기’,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하기’, ‘자녀에게 편애를 보이지 말고 똑같이 소중하게 사랑하기’ 등의 의무를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녀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 온유함과 친절함에다, 주님의 교양과 훈계가 요구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호흐는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곳이자 그리스도인을 길러내는 중추적 기관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 호흐의 그림에서는 이런 것들을 상세히 나타내지 않는다. 만약 이 지침서에 따라 교재용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1차원적 용도에 기울어 오늘날과 같은 명화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 화가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간접적으로 집 분위기를 전하고 가정의 미덕이 부각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더라도 그의 그림의 갖는 의미 내용과 작품을 탄생시킨 지배적 환경, 즉 기독교적 생활관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야코부스 꿀만은 무엇보다 가정교육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양육과 거룩한 가르침의 의무를 다하여, 자녀들의 내면에 은혜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선,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이 전승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 쓰임받는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