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김덕기, 행복한 가족의 조건
가족, 그림 이유이자 활력 발원지
행복, 가까운 현재진행형 드라마
응달 없이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
저 가족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워
삶의 무늬, 섬세한 색채 감성으로
풀무질하듯 기운 불어넣고 위로
김덕기에게 있어 가족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자 활력의 발원지이다. 그가 선택한 모티브는 어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집 마당의 가족, 곤충채집을 하는 아이, 벤치에서 담소를 나누는 부부, 들풀이 무성한 시골길, 가족의 나들이 등이 화면을 채운다.
작가가 가정에 주목하는 것은 그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있고 난관을 헤쳐가기도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가치관과 인생관을 배우며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곳도 다름 아닌 가정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적신호가 켜졌다. 오랜 기간 전승되어온 최소 단위의 공동체가 급속히 붕괴되어 가는 것이다. 곧 사회의 중요한 안전망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 현상이 가속화되면 우리는 혈육의 도움도, 가치관과 신념도, 사랑의 양육도 받지 못하는 난감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가정의 위기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김덕기의 작품에 귀 기울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집이지만 가꿀 수 있는 꽃과 나무들이 있어 만족한다. / 부유하지 않지만 나를 믿어주는 아내와/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감사한다. / 딱딱하고 차가운 외부의 도전들이 조간신문처럼 찾아오지만 / 꽃피우고 떨어지는 사이에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훨씬 작아진다. / 오늘도 파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어 감사하다.”
김덕기의 그림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삶의 즐거움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행복은 아득히 먼 훗날 성취할 꿈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드라마로 제시된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은 칙칙한 흑백의 세상이 아닌, 기운 충천한 색깔로 채색된 환희에 찬 세상이다. 그의 그림에는 ‘응달’이 없다. 흡사 눈이 부신 아침의 햇살이 영롱하게 빛나듯이 반짝인다.
수만 개의 섬광이 수면 위에 움직이는 호수의 수정조각처럼 그의 그림은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하다. 물론 그런 기쁨의 비밀은 가족에 있다. 가족이 작품의 줄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를 더해준다.
<가족- 행복한 식탁>은 중앙의 집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식탁 위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시장에서 사가지고 온 채소와 과일이 올라와 있다.
조촐한 식단은 가족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묻혀버린다. 이들을 축복하듯 새들이 지저귀고 주위는 온통 환희에 휩싸여 있는데, 이런 요소들은 화목한 가족을 띄우는 보조물로 기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자이크처럼 색점이 촘촘히 박힌 잔디밭은 기쁨과 감사가 넘쳐흐르는 곳임을 암시한다. 화면이 이처럼 떠들썩한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와 엄마, 두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무슨 특별한 일을 하고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은 내일에 관해서 걱정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다. 이런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가족- 행복한 식탁>이 가족의 모습을 근거리에서 포착하였다면, <함께 하는 시간>은 원경에서 가족을 포착한 그림이다. 바깥에 나온 가족은 꽃과 잔디에 물을 주고 엄마와 아빠는 스튜디오 앞의 감나무를 돌보고 있는 중이다.
주위는 역시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있다. 주위를 ‘꽃동산’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각종 화초들에 둘러싸여 있다. 강아지들도 뛰어놀고 있으며, 나무 위에 앉은 새들도 가족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가족은 가장 좋은 것들을 베풀어주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일해 있다.
작가는 지금까지 창작생활을 하면서 지켜온 것이 있다. 그것은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꾸려가자는 소신이었다. 그렇게 한 가지만 고집해온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족이 기쁨의 원천이자 감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김덕기의 그림을 보면 “저 가족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부러움을 갖게 된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가 감상자에게 쉼을 주는 ‘안락의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김덕기는 사람들에게 ‘쉼터’가 되기를 바라며 이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는 듯하다.
작가는 우리 삶이 찬란함으로 직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작품에 매진한다. 그림 한 점을 완성한다는 것은 곧 감상자에게 희망을 선사한다는 행위와 같다.
여기에 덧붙여 삶의 무늬들을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하면서 가족이 펼쳐가는 ‘행복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은, 그가 낙천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축복을 보는 사람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의도이리라.
그의 작품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해맑고, 어떤 면에서는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이런 낙천적인 그림을 통해 그는 지치고 상한 사람들에게 마치 풀무질을 하듯 기운을 불어넣고 위로의 손길을 편다.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내라고 응원을 보내는 것 같다.
서성록 명예교수(안동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