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역사강좌 ‘순교, 다시 새기다’서 김영진 박사 강연
양화진문화원(원장 김성환, 이하 문화원)이 제11회 양화진역사강좌 ‘순교, 다시 새기다’를 2월 한 달간 개최 중이다.
2일 진행된 1강에서는 김영진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아시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수난’을 주제로 강연했다. 김영진 박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학석사,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전공 분야 외에 동아시아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삶과 신앙, 수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으며,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진료와 저술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광기의 사회사』,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 『우리 곁의 정신분열병』, 『동아시아의 순교 이야기』, 번역서로는 『프로이트는 요리사였다』, 『젊음을 읽는 코드』 등이 있다.
김 박사는 “왜 정신과 의사가 초기 교인에 대해 공부하고 조사를 했나 의문스럽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이 초기 교인이 많이 살았고, 순교 유적지들이 엄청나게 많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순교 유적지를 돌아보다 보니, 자료를 찾게 되고 이를 정리하게 됐다”고 강연 이유를 밝혔다.
그는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먼저 일본에 들어 왔다. 1549년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포르투갈의 무역 거점인 인도 고아를 거쳐서 일본 가고시마에 상륙하며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했고, 혼슈까지 교인 수가 크게 증가했다. 지역 영주들은 무역으로 세를 키울 욕심으로 부하에게 (개종을) 권유하고, 차차 평민과 천민에게도 가톨릭이 전파돼 교인 수가 증가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유교 중심의 질서, 군사부일체, 신분 구별과 상하 복종의 위계질서, 조상 숭배의 미풍양속을 무너뜨리는 평등과 형제애”가 상민과 천민에게는 매력요인이었지만, 윗사람들에게 박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경계하고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소극적이지만 선교 활동을 하고 지냈다. 결국 1597년 체포령이 내려졌다. 크리스천들의 귀를 자르고, 엄동설한에 선교 활동이 제일 활발하고 외국인이 오는 나가사키까지 800m를 끌고가 십자가 처형을 했다. 이후 마을마다 신고를 독려하며 포상을 약속했고, 연좌제까지 시행하며 감시와 박해를 지속했다”며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도 나오지만, 매년 후미에(踏會·답회: 예수 그림을 밟고 가지 않으면 처벌) 제도를 실시했고, 고문과 처형, 화형으로 많은 사람이 순교했다. 겐나 대순교 때는 55명이 화형당했다. 이후 일본 최대의 민중 봉기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다. 그 후 교회는 다 부서지고 불타,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또 중국에서는 산발적인 체포와 구금이 이루어졌다고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 출간된 ‘천주실의’는 일본과 조선에 가톨릭이 전파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김 박사는 “당시 천주실의는 굉장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성경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 이해 못하고 거부가 심할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유교를 최대한 활용해 천지 창조와 사랑, 부활의 개념을 설명한 것으로, 이는 그다지 박해를 받지 않았다. 이는 일본과 조선에도 들어갔다. 이후 북경 사절단의 방문 코스에 천주당이 포함하기도 하고, 서양의 학문, ‘서학’으로 공부하던 것을 차차 신앙에 눈을 뜨면서 ‘서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고 했다.
이어 조선의 지도자 이승훈, 이벽과 정약용을 언급한 그는 “윤지중과 권상연이 처형되며 첫 순교자가 나왔고,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을 비롯해 양반층 교인은 일부 옥사 및 순교당하고, 일부는 배교하면서 현저히 약화됐다”고 했다. 또 “정약용은 배교하고 조용히 은둔하게 되는데, 신자로 돌아왔는지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다”고 덧붙였다.
19세기 상황을 설명한 김 박사는 “250년 동안 지하 교회 활동을 하던 일본 교인들이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나라가 새로 바뀐 줄 알고 전면에 등장한다. 십자가를 내놓고 장례를 치르며 크리스천임을 밝혔다. 우라미키 마을 800가구 거의 전부가 교인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며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박해가 계속돼 3천 명 이상의 크리스천은 전국 22곳으로 분산해 유배당했다. 귀향자는 2천 명 정도였다. 유배되는 과정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맞아 죽은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중국에서도 큰 규모의 박해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은 1870년 천진교난이 벌어진다. 군중이 폭도가 돼 ‘서양인을 죽이자’며 교회를 방화·파괴하고 교인 살해를 저질렀다. 또 1900년 초 의화단 사건 때 외국 공사관과 교회를 공격하고 교인을 학살했다”고 했다.
또 “김대건 처형 이후 조선에서도 대원군 치하의 박해가 이뤄졌다. 특히 1866~1871년에 걸친 박해가 매우 참혹했다. 4차례의 큰 박해를 거쳐 8천 명 이상이 처형됐다. 처형지는 처음에 전국이었으나 나중에 양화진·서소문에 집중됐다”며 “다 파괴되고 죽고, 가톨릭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다. 그리고 기독교에 의해 그리스도가 다시 전해졌다”고 했다.
그는 “평신도 중심의 참여를 유도하며 조선 사회가 굉장히 많이 변화됐다. 현대적·근대적 교육기관을 설립해 소외된 계층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백정의 자식에게 의사의 길을 열어 준 곳이 기독교다. 평신도 중심의 개신교 선교는 역동적이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아시아 3국의 수난(순교) 결과가 오늘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은 한국이다. 일본은 신구교 합쳐도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로 인해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며 “요즘 청년들이 작은 실패와 좌절에도 참지 못하고 포기하는 나약함을 보이는데, 이러한 신앙, 이 열기가 전달이 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한편 제11회 양화진역사강좌 ‘순교, 다시 새기다’ 2~4강은 송혜경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정기문 교수(군산대 역사학), 최상도 교수(호남신대 역사신학)가 강사로 나서 ‘사도들의 순교: 신약 외경의 기록’,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와 순교’,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한국 개신교 순교자 추서 과정과 특징’을 각각 강연할 예정이다.
양화진문화원은 “믿음 생활을 하는 데 너무 자유롭고 평온한 현 시점에 다시 순교에 대해 새기면서, 진정한 신앙은 무엇인지 역사와 순교자의 삶을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며 “긴 시간 휴관 뒤에 작년 재개관한 순교자기념관을 수선하면서 순교자에 대한 재정립과 잘 알려지지 않은 순교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로,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관심 가지지 못했던 이야기에 집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