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신학연구소 김균진 소장, ‘서거 1주년 기념사’ 전해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사신 분
역사의 소용돌이서 학자의 사명 묵묵히 다해
불모지 같은 한국 신학계에 학문적 기초 세워
‘기독교사상사’ 등 주옥 같은 저술로 후학 양성
혜암신학연구소, 진보와 보수 만남의 장 마련
한국기독교사 최초 에큐메니칼 신학운동 시작
진보 신학계의 거두였던 故 혜암 이장식 박사(전 한신대 명예교수) 소천 1주기를 맞아 혜암신학연구소 소장 김균진 박사(연세대 명예교수)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별과 같았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1921년 4월 17일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혜암은 평생을 신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지난해 10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은퇴 후 70세에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떠나 14년간 사역하며 한국 교계에 강렬한 도전을 주기도 했다. 김 박사는 15일 ‘서거 1주년 기념사’를 통해 “교수님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특혜였다”며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김 박사는 “파란만장했던 한국 근대사를 몸으로 사신 분”이라며 “일제 치하에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셔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으시고,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의 사상 투쟁,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에 걸친 한국전쟁, 4.19 혁명과 5.16 군사혁명, 1970년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한국 경제의 급속한 발전과 한강의 기적,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등, 한국 근대사의 산 증인”이라고 했다.
그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세속의 명예를 탐하지 않으시고, 학자로서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다하시는 모습을 후학들에게 보여 주셨다”며 “한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처럼 사회 활동, 정치 활동에 열심하는 일부 교수님들에 비해, 이장식 교수님은 역사의 흐름을 하나님께 맡기고, 불모지와 같은 한국 신학계에서 자기 전공 영역의 학문적 기초를 세우셨다”고 했다.
또 “학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묵묵히 충실하는 분으로 저희 후학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어느 것이 정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인지, 후대의 역사가 판단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 신학계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교수님의 「기독교사상사」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세계 교회사는 물론 아시아 교회사 분야에서도 이장식 교수님은 뛰어난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이시고, 다사다난했던 20세기 한국의 역사 속에서 주옥과 같은 저술들을 남기셨다”고 했다.
그는 “교수님의 강의는 세계 교회사와 신학사 전체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명료하고 체계 있게 진행되었다. 학부 과정에서 이장식 교수님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큰 특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도 했다.
그는 특히 “한국신학대학에서 정년 은퇴하신 후 70세가 넘은 연세에 머나먼 아프리카로 가셔서 선교에 몸을 바쳐 교회와 학교를 세우기도 하시고 신학교육에 전념하기도 하셨다. 또 약 10년 전 혜암신학연구소를 설립하셔서 한국 기독교의 보수 계열과 진보 계열의 신학자들의 만남과 친교의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에큐메니칼 신학 운동을 시작하셨다”고 전했다.
그는 “교수님이 출판하기 시작하신 연구소의 논문집 「신학과 교회」는 보수 계열 신학자들과 진보 계열 신학자들이 공동의 주제 하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한국 신학계 유일의 에큐메니칼 연구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했다.
김 박사는 “교수님이 서거하신지 벌써 일 년이 지났지만, 교수님은 저희 후학들에게 한국 기독교 역사의 별과 같았던 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수고를 끝내시고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품 안에서 안식하시는 교수님. 교수님과 교수님의 남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평화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한편 ‘한신대 1회 졸업생’이기도 한 혜암은 예일대학교 신학부 연구교수를 비롯해 영국 맨체스터대학교 신과대학 명예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고 한신대, 계명대, 장신대, 감신대, 서울신대, 숭실대, 고려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은퇴후 70세의 나이로 아프리카 케냐장로교신학대에 교수 선교사로 나가 14년간 봉사했으며, 귀국 후 85세의 나이로 혜암신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의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신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