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앙과 과학 7]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신화
근래에 구약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역사와는 무관한 고대인의 세계 인식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류의 기원을 진화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과학의 영향과 맞물려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창세기 1-3장은 도무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기록이다. 그들에게 이 기록은 고대 근동 세계에 흔한 신화의 하나일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관점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문제점들을 간단히 짚어보고, 구약의 창조 기사를 신화와 연결짓는 것이 잘못임을 말하고자 한다.
19세기 중반부터 세상에 빛을 보기 시작한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텍스트들은 고대 근동 세계에 우주와 인간의 기원 및 홍수 심판에 관한 신화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850년 신앗시리아 수도 니느웨의 아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굴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길가메시 서사시(the Gilgamesh Epic)이다.
이 발견은 성경학자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급기야는 구약성경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홍수기사는 바벨론의 신화들을 모방한 것이거나 그것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런 주장들은 창세기가 세상의 기원에 대해 믿을만한 사실을 알려주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는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이들에게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고대인의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이스라엘인의 세계 인식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하나는 에누마 엘리쉬가 구약성경 창세기보다 더 오래된 글이기에 창세기 1장의 무대가 된다는 생각이며, 다른 하나는 둘 사이에 그들이 속한 ‘문화적 틀(a matrix of cultural factors)’로 인한 유사성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첫 번째 생각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에누마 엘리쉬 토판들은 모두 주전 일천년 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작품의 창작 시기 또한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람베르트(Wilfred. G. Lambert)의 연구에 따르면, 에누마 엘리쉬는 일러야 주전 1100년경에 만들어졌으며, 기존의 것에 여러 자료들이 덧붙여진 ‘복합물(compositum)’이다. 이는 바벨론이나 수메르의 규범적 우주론을 보여주기보다 “신화적 줄기들의 분파적, 비정상적 결합”의 성격을 갖는다.
이것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하였을 당시 도서관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대성을 이유로 에누마 엘리쉬가 창세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다.
대상(隊商)들의 활동이나 군사 원정으로 인한 국제교류가 빈번하던 당시 세계에서 영향의 방향을 확인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홍수 기사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상 창세기의 홍수 기사와 바벨론의 길가메시 서사시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신(들)의 노여움을 산 인간이 홍수심판을 받게 되고, 한 사람이 배를 만들어 자신과 가족들과 동물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홍수가 끝나자 배가 산에 머물고, 살아남은 홍수의 주인공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홍수의 주인공이 물이 감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새들을 내보내는 것은 놀라운 유사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 또한 남아있는 사본은 모두 주전 750년 이후의 것이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서사시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구전으로나 기록으로 이미 존재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서사시의 초기 형태에는 새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람베르트는 “가장 현저한 유사점에 대하여 남아있는 유일한 증거는 성경의 기록보다 더 늦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길가메시 서사시가 오히려 창세기의 홍수 기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두 기사 모두 과거에 있었던 거대한 홍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구약 성경과 바벨론의 신화들이 동일한 ‘문화적 틀(a matrix of cultural factors)’을 공유한다는 주장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문화 속에서 신화적 세계관을 공유하였다는 인식이 우세하다. 이는 구약성경이나 바벨론의 문서들이 모두 신화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이 모두 외형상으로는 고대 근동이란 문화의 배경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화적 세계관이란 어떤 것인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신화와 연결하는 구약 학자 피터 엔스(Peter Enns)에 따르면 “원초의 시간(primordial time)과 현재의 시간(present time)이 서로 교차한다고 믿는 것”이 신화적 세계관의 특징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는 모든 고대 근동의 종교들은 이들 형성적인 원초의 신적 행위들(formative primordial divine actions)이 단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사건들 및 일상의 삶과 어떻게든 교차하는 것으로 믿었다.
예를 들면, 곡식들이 해마다 ‘나고 죽는 것’과 계절의 변화는 신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원초적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고대의 예배는 사실상 원초적인 신의 행위와 현재 지상의 형편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기리는 일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오스왈트(John N. Oswalt)는 현실 세계를 이상적인 세계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곧 신화라고 설명한다.
신화적 세계관에 속한 사람들에게 인간 세계는 신들의 세계를 어렴풋이 반영한다. 그들에게 있어 문제는 현실 세계가 어떻게 이상적인 신들의 세계와 완벽하게 일치하게 할 수 있느냐이다. 이에 대한 답이 곧 신화이다.
고대인들은 신화를 이야기함으로써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연결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신화의 내용을 제의(ritual)를 통해 재현하는 것은 더욱 효과적이다.
따라서 신화적 사고에는 역사(history)가 설 자리가 없다. ‘실재(reality)’가 현실세계에 있지 않고 이상적인 신들의 세계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 배후의 철학적 원리는 연속성(continuity) 또는 상응(correspondence)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모든 것은 상호 연속적이다. 원초의 시간과 현재가 상응하며, 신들의 세계와 현실세계가 하나가 된다. 오스왈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신화는 그 전체 근거에 있어 우주 만물이 서로 연속적이라는 생각에 의존한다. 더 나아가 신화는 그 연속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기에 신들에 대한 신화적 묘사는 언제나 그들을 철저히, 더욱 더 인간으로 그린다. 그들은 강하다; 그들은 약하다; 그들은 선하다; 그들은 나쁘다; 그들은 믿을 만하다; 그들은 변덕스럽다. 인간의 모습 그것이 곧 신들이다.”
신화를 이렇게 정의할 때 분명해지는 사실은, 구약의 내용은 신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전적 타자(Wholly Other)’이시다. 하나님은 다만 말씀으로 온 세상을 무(無)에서 유(有)로 이끌어 내신 전능한 분으로서 세상과 전적으로 분리될 뿐 아니라, 일체의 인간적인 것과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거룩한 분이다.
그렇다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세상과 동떨어져 계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에 개입하실 뿐 아니라, 세상을 자신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이끄는 주권적 통치자이시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역사에 대한 높은 관심이다. 구약을 펼치면 신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혼란스러운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시간과 공간 안에서 개인과 가정과 국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장구하면서도 일관된 역사의 서술을 만난다.
이는 역사에 무관심한 주변 세계의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은 구약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신화와 연결지으려는 근래의 노력들과 주장들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결코 고대 근동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나온, 과학적 사고와 동떨어진 원시적 세계인식의 산물이 아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역사의 시작에 있었던 ‘하나님의 큰 일’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김진수 교수(구약신학,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