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의 ‘슬로우 리뷰’ 내용에 전해진 뜨거운 반응들을 놓고, 이정규 강도사님이 추가 의견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정규 강도사.

저는 지난번 글이 이렇게까지 반응을 얻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지난 몇 주간은 제 글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응원과 비판을 분에 넘치도록 들어야 했습니다. 초기 며칠은 제 본분에 충실하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제 몸글과 페이스북의 댓글, 공유한 글의 댓글에 수도 없이 많은 반응이 달렸는데, 제가 모든 댓글에 성실한 답변을 하기에 벅찰 정도였습니다.

뒤늦게 저는 비로소 ‘가나안 현상’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주제였음을,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지난 글은 사안이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썼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분들이 많이 계셨음을 압니다. 이 지면을 빌려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많은 분들이 제목이 과격했음을 지적하셨습니다(제목 뿐만은 아니었지만요).

다만 지난 글은, ‘가나안 성도들’을 향한 글이 아니었음을 인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가나안 현상’을 바라보는 양희송 대표님의 시각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양 대표님의 책이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잘못된 글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대안이 없다 하더라도, 문제 제기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양 대표님이 문제를 직시하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안을 그에게 다 떠안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대안을 함께 만들어 가야겠지요.

본래 첫 글을 쓸 때만 해도 단순한 서평 하나 쓰자는 생각이었기에 추가 논의는 예정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반응들은 저나 양 대표님 모두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 부분이 있고, 변명 뿐 아니라 일치를 위해서도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는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이번 글을 포함하여) 글을 세 번 정도 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1. 우선 이 글은 먼저 ‘가나안 성도들’을 향한 편지가 될 것입니다. 여러 번 언급했지만, 저는 양 대표님의 교회론에 반대를 표한 것일 뿐, 가나안 성도들의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말 안 듣고 교회 떠난 탕자들”로 매도될 수 없으며,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면에는 우리나라 교회의 고통스러운 타락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글에서 그럼에도 꿈꿀 수 있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2. 그 다음 글은 첫째 글에 대한 부연으로서 ‘제도적 교회’에 대한 제 나름의 ‘성경적 변증’입니다. 이 글은 교회론의 핵심이 되는 몇몇 성경구절에 대한 광범위한 주해(Exegesis)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짧으면 한 번, 길면 두세 번 정도 글을 쓰게 될 것입니다.

3. 마지막 글은 가나안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이 될 것입니다. 교회론이 아무리 정확해도 구조 자체가 이상적 교회론을 ‘이상’으로만 남게 하는 상황이라면, 구조 자체를 의심해 보아야겠지요. 그래서, 이번 글과 다음 글이 가지고 있는 이상이 이상으로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나라 교회의 구조적 한계와 특히 ‘교역자들’이 봉착한 문제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바로 이번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아래는 ‘가나안 성도들’을 향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래 글은 가나안 성도들은 향한 ‘설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을 양산한 ‘교회’는 정당한가

 

우선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는, 그럼에도 ‘신앙’은 포기하지 않은 당신에게 감사와 격려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제도적 교회를 옹호하는 사람이지만, 때로는 제도적 교회에 머무르는 것이 신앙에 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라는 당신의 선택이, “이 제도적 교회를 다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교회를 찾아 보라는 말도, 좋기는커녕 그저 상식적인 정도의 교회를 찾기도 힘든 구조와 상황에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아 보라는 말 만큼이나 가혹할 뿐입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가나안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정당한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 물음보다 더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이 선재(先在)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가나안을 그렇게 많이 양산해 낸 ‘제도적 교회’의 신앙은 과연 정당한가?” 저는 지난 글에서 첫 질문에 대한 비관적인 답을 말했으나,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는 훨씬 비관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합니다. “네. 가나안인들의 신앙을 묻기 이전에, 가나안을 양산한 교회의 상태는 훨씬 부당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런 문제 제기를 먼저 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교회를 개혁하고자 나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하는 비판을 보며 제 자신의 교만함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때 제도적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에 비판의 날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그토록 비판했던 제 마음의 원인은 “나는 더 나은 사람이고, 내가 개척한 교회는 더 깨끗하고 바른 교회이지”라는 자기증명에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하여 섬긴 지 4년이 된 목회자입니다. 요즘에야 비로소 저는 제가 비판했던 그 제도적 교회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우리 교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를 비판하는 제게, 우리 주님께서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눅 11:46)” 라고 책망하실까 봐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음에도 (저를 포함한) 우리나라 교회가, 더 정확히는 교역자들이 부패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도적 교회’를 옹호한 제 지난 글에 대한 무수한 댓글 중에서, 제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댓글은 이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치리와 권징을 강조하지만, 우리나라 교회가 전병욱을 치리했느냐? 그럼에도 제도적 교회가 옳으냐?”는 것이지요. 이 반문에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가나안이 정당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 훨씬 이전에, 가나안 성도들이 원래 있었던 그 ‘제도적 교회들’이 더 정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혹자는 제게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에 안 다니고 있으니, 이미 성도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신학적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도적 교회는 무조건 교회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말했던 교회의 표지가 정당하게 지켜지고 있는 겁니까? 바른 복음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있습니까? 목양적 사랑으로 말미암은 권징이 있습니까?”라고요. 제도적 교회는 가나안 성도가 성도인가를 묻기 전에 자신이 성경적 ‘교회’인가를 먼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과 같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증가 현상은 성도들의 일탈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의 제도 자체를 부정해서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목회자들과 그들이 만든 ‘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도망 나온 사람들입니다”라는 말도 공감합니다. 또한 페이스북 ‘가나안 성도’라는 페이지의 소개글인 “교회를 안 나가는 게 아니고 가나안으로 가는 겁니다”라는 말에도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고통은 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공동체 없이 홀로 남아 있는 것이 대안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외롭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나안 성도가 그 자체로 대안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저는 지난 글을 쓰고 양희송 대표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양희송 대표님은 공동체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렇다면 제도교회 내에 과연 공동체성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뼈아픈 지적이지요. 이에 저는 그것이 가나안 성도들이 공동체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런데 양 대표님은 “오히려 가나안 성도들끼리,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 방법으로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라고 답했습니다(들은 말을 옮긴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양 대표님이 만든 세속성자 모임이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도 ‘청어람’이라는 ‘조직’의 대표인 양희송이라는 사람이 조직하여 만든(어쩌면 개척한) 모임입니다.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시작은 아닌 것이지요(그래서 세속성자 모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가나안이 더 자발적·창의적으로 모일까요? 오히려 훨씬 많은 수의 가나안들이 홀로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운 교회를 다니느니 혼자 있는 것이 더 나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신 공동체의 복은, 포기하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복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의 명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위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원수들 가운데 살았다. 마지막에는 모든 제자가 그를 떠났다. 십자가에서 악한 자와 조롱하는 자에게 둘러싸인 그는 오직 홀로였다.”

성도가 성도와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고독하게 원수들 가운데 둘러싸여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복을 누리지 못하셨습니다. 본회퍼는 한 페이지 뒤에서 이런 복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서 은혜 가운데 선취한 것(p.22)”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지독하게 외로움과 고통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본회퍼는 잠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신체적으로 함께 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비할 수 없는 기쁨과 힘의 원천이 된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 ‘믿음으로 얻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어 감옥으로 찾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디모데를 다시 보고 싶었고 곁에 두고 싶었다(p.23).”

네. 한국의 제도적 교회는 문제투성이이며 고민거리이지만, 그래도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는 포기하기에는 매우 좋은 복입니다. 저는 현재의 가나안을 정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가 행복한 것도 아님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도 선물로 주셨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복,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

이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간략하게나마, 교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근거로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회를 묘사해 보겠습니다.

1.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며 설명하는 일에 능숙하게 훈련된 목회자가, 청중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사랑을 품고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옳은 교회라고 믿습니다. 목회자는 가르칠 뿐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풍성함을 드러내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는 모든 신학생이 이와 같은 목회자가 되게끔 훈련해야 할 것이고요.

2. 저는 주님께서 베푸신 성례가 은혜롭고 바르게 시행되는 곳이 올바른 교회라고 믿습니다. 성례가 단순한 형식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을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에 성례의 바른 시행은 교회 됨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것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요 눈으로도 봅니다.

3. 저는 권징이 있는 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믿습니다. 권징은 단순히 혼내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개인들이 짓는 죄에 대한 공동체적 저항입니다. 우리는 눈물과 기도로 서로의 죄를 지적하며, 죄가 드러날 때마다 오히려 자신을 살피고, 정죄보다는 회복을 위해 때로는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이는 고통스럽겠지만 은혜의 과정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자신의 거룩함과 자비를 모두 드러내십니다.

4. 저는 연약한 성도끼리 서로 돕고 나누는 교제를 믿습니다. 한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가난과 연약함과 병을 각자 해결하게 두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 가운데 가난과 연약함이 존재함에도 해결될 것입니다. 이로써 불완전하지만 제도적 지역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5. 위의 기능을 수행하는 에클레시아는, 반드시 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제도와 직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도와 직분자는 반드시 민주적(民主的)으로 형성되고 세워져야 하며, 직분자들은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교회를 섬기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헌신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인격적이며 따뜻한 동시에 세상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해야 하고, 문화를 거스르지만 문화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성경이 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펼치려 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교회를 꿈꾸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런 교회는 본 적이 없거니와 소문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이런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대체로 듣는 지역 교회의 모습은 위의 모습들과 정반대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역시, 작기 때문에 큰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도드라지지 않지만, 죄악된 인간끼리 복닥거리면서 문제를 만들어 낸다는 측면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특히 1번 항목에서요).

하지만 제 소견에는, 어떠한 조직도 형태도 없이 ‘가나안 성도들끼리, 더 자발적이고 창의적 방법으로 에클레시아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는 것 역시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둘 중 뭐가 더 현실성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둘 다 요원해 보인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만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도 당신이 필요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당신이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정확히 알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저희 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는 성경적 이상에는 한참 거리가 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교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표현마저 칭찬에 가깝지만) 시원치 않은 죄인임에도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가나안이었다가 정착한 사람들이 비율상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모저모로 모이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들 덕분에, 우리 교회는 좀 더 좋아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인생 가운데 교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경험이 있고, 바른 교회에 대한 이상을 품고 있기도 했으며, 좌절해 보기도 했고, 상처를 받기도 하며 주기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서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함께 세워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점점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함께 공유하게 했지요.

주로 강단에서는 제가 성경 강해로 우리 모두의 죄를 (그리고 구원도) 지적하지만, 사실 죄가 가장 많이 드러나고 지적받는 사람은 저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제도 교회에 실망하고 고통받아 본 사람이야말로 목회자가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교만을 가장 민감하게 잡아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들의 예민한 지적과 돌봄은 저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으면서 제 자신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우리 교회에서 떠나서 또 가나안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고 저는 어떤 사람이든 품고 사랑할 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자주 무관심과 상처주기로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습니다. 그보다 저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지요.

그럼에도 우리 교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출신의 성도들은 저와 우리 모두를 함께 변화시켜 갔습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지만) 우리 모두에게 힘을 주기도 했고, 상처를 주기도 했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먹기도 하고 놀러도 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라고 회원이 되기도 했고, 이 교회에 언제까지 머물지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있다가 떠나기도 했지요.

이런 의미에서, 제도 교회를 다시 나가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교회가 주는 복과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교회도 당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돌봄을 받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며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셨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땅 어딘가에는, 당신이 누릴 뿐만 아니라 당신이 도울 공동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다시 고민해 봅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라고 물으신다면, “그러니깐 다시 좋은 교회 찾아서 정착하십시오”라고 즉각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즉각적인 행동보다는 고민과 생각이 더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한 존재이지요. 저는 그냥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보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시길 간청합니다.

또 교회를 찾는다면, 그것도 역시 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은 차분하고 진지하게,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다시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배웠으면 합니다.

“정말 제도 교회가 답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아직까지는 일단 “어쨌든 당신은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형제 자매와의 연합과 동행이 필요합니다”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공유하고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니까요.

그리고 다음 번 글에서는 왜 제가 영적일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교회를 믿는지에 대해 겸허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동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살펴보면서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면, 다음 번 글에서 당신의 의구심을 풀 수 있을만큼 치밀한 동시에 신학적으로 훈련받지 못한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주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십시오

지금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분량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당신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말씀을 드릴지도 이야기했지요. 그보다 저는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제 글에 대한 비판도 환영합니다. 가나안이 아닌, 제도 교회의 교역자인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고 못 보고 있는지 지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많이 배울 것입니다.

그보다 더, 먼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신앙에 회의를 품고 있다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다녔던 교회는 어땠는지, 그리고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가까운 교회로 가면 되겠네”나 “우리 교회로 오시든가” 따위의 가벼운 대답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같이 공감하고 같이 울어 봅시다. 그렇다면 언젠가 함께 같이 기쁘게 웃을 날도 오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구합니다.

/이정규 강도사(시광교회, 「갈라디아서: 통합적 성경공부 시리즈」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