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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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뱅을 잘 위로하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던 마틴 부쳐 목사

깔뱅의 개혁과 개신교 신학의 밑거름 된 마틴 부쳐

그 후 부쳐는 개혁 사상의 열렬한 수호자로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하며, 깔뱅에게도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1506년-1541년까지 주교였던 기욤도 자신에게 속한 성직자들의 개혁을 시도한다. 개혁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1524년에는 자신들의 언어인 …

깔뱅의 ‘종교 개혁’ 이전, 시대 앞선 개혁자들

1525년부터 모(Meaux) 그룹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르페브르와 제하드 후셀(Gérard Roussel)과 미셀(Michel d'Arande)은 스트라스부르로 피신하여 까삐토(Wolfgang Capito)의 집에 머물게 된다. 모 그룹 개혁자들이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할 당시, 까삐또와 마틴 부쳐(M…
깔뱅은 본인이 알고자 하는 것을 찾기 위하여, 바젤에서 페라라까지 600Km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방문하는 학문적 열정을 보였다.

깔뱅이 목회했던 난민 위그노 교회

스트라스부르그가 있는 알사스 로렌 지방은 유럽의 종교 개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은 1521년부터 종교 개혁의 기운이 돌았다. 스트라스부르그 성당의 설교자 마티우 젤(Mattieu Zell) 루터의 책을 접한 후,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를 루터식으로 설교하는 일…
발도파들은 고도 2천-3천미터의 험한 산에서 신앙을 위해 숨어 지냈다.

일상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구원 이해한 발도

하지만 발도는 그의 영혼에 평화를 갖지 못했다. 그는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유익한 라틴어 번역 성경 뿐인 시대에 성경을 아는 일에 목 말라했다. 두 사제의 도움으로,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
파렐

성경 번역, 무지에 사로잡힌 시대를 인도하다

종교 개혁을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에 의해 교황과 미사를 반대하는 글이 나붙는 벽보 사건이 일어난다. 그 내용은 “매번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시켜서는 안 되며, 우상적인 교황주의를 깨뜨리고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유…

“하나님께서 그대 통해 그의 나라를 세우시리라”

온종일 자료를 찾다가 소중한 자료를 발견했다. 깔뱅(칼빈)이 머물렀던 친구 집 사진이다. 앙굴렘은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깔뱅이 머물렀다는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고, 알았더라도 자료가 없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
파리 노트르담 성당.

피신의 길에서 나온 역작, <기독교 강요>

노트르담(Notre Dame)은 ‘우리들의 부인’이라는 의미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며, 프랑스 각 도시마다 노트르담 성당들이 있기에,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은 ‘파리 노트르담’이라 불러야 정확하다. 프랑스에 있는 오래된 성당 어디…

복음의 절대성 강조한 연설문으로 박해 시작돼

파리에서 세번째 학교 Collège Royal과 네번째 학교 Collège Fortet 오를레앙에서 법 공부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깔뱅은 1530년에 새로 설립된 왕립학교인 Collège Royal(오늘날 Collège de France)에서 보다 심도 있게 어학 공부를 하고자 했다. 이 대학에서…
부르쥬 쌍 티엔느 대 성당

완연한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깔뱅

중세 도시의 육중한 무게감을 느끼려면 부르쥬로 가야 한다. 1324년 5월 13일에 완공되었으며 순교자 스데반에게 헌정된, 118m 길이와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부르쥬 대성당을 바라보면 파리 노틀담 성당은 왠지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웅장함 앞…
파리에서 오를레앙

인문주의와 개혁주의의 집합소 ‘오흘레앙’

쟌 다르크의 활동으로 유명한 도시 오를레앙은 파리에서 약 130km 떨어진 도시이며, 오를레앙이 있는 Val-de-Loire 지역은 깔뱅이즘(칼비니즘)의 큰 거리라 불리는 중요한 지역이다. 오를레앙은 새로운 개념들의 발달과 개신교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다 준, 중세 시대의 …
프랑스 개신교 연합회에서 깔뱅 탄생 500주년을 맞아 발행한 기념주화. 지름 6.8cm, 두께 0.5 cm의 주화 앞면에는 오른손으로 성경을 쥐고, 왼손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깔뱅 500주년, 숫자에 집착 말고 본질을”

우리는 100이나 1,0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새천년과 신년과 관련된 행사에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깔뱅(칼빈) 탄생 500주년의 500이라는 ‘숫자’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는 전혀 없다. 본질적 의미를 망각한 채 500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
꼴레쥬 몽테규 현재는 앙리 4세 고등학교 도서관으로 사용

깔뱅을 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한 ‘만남’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깔뱅은 좀 더 나은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거리상으로 멀지 않은 꼴레쥬 몽떼규(Collège de Montaigu)로 전학을 하여 5년간을 공부하게 된다. 이 학교는 에라스무스가 공부하였던 곳이며, 1528년에는 예수회(Jesuit)를 창설한 이그…
꼴레쥬 드 라 막쉬. 현재는 프랑스 정부가 다른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깔뱅, 파리에서 종교 개혁의 출발선에 서다

깔뱅이 14세가 되던 해인 1523년 8월에, 아버지 제라드 꼬뱅(Gérard Cauvin)은 깔뱅이 사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파리로 유학을 보낸다. 깔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무르다가 두 달 후에 꼴라쥬 드 라 막쉬(College de la March)에 입학한다.처…
비스꽁티 거리에 세워진 파리 최초의 교회 교인들이 모였던 지하교회 장소.

유럽 전역에 큰 영향 준 ‘신앙고백’ 나온 거리

비스꽁티(visconti) 거리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목사가 위임받은 곳이기도 하며, 그 목사가 첫 세례를 베푼 장소이기도 하다. 1555년에 이곳 주민들이 모인 가정교회는, 22살에 법을 공부한 쟝 르 마송(Jean le Macon)이라는 젊은 청년을 이 교회의 목사로 위임했다. 그리고 모…
마튀랭 교회

위그노들의 신념, 마침내 파리에까지 개혁교회를

뚜상(Toussaint, 만성절)날 깔뱅(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콥이 마튀렝(Mathurins)교회에서 파리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깔뱅은 박해를 받고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분노한 프랑수와 1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루터 이단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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