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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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 개혁자 동상 옆에 있는 꼴리니 동상.

‘위그노의 거장’ 갸스파 드 꼴리니 제독

제네바 종교 개혁 공원의 개혁자들의 동상 오른편에 꼴리니의 동상이 서있다. 깔뱅이 프랑스 종교 개혁의 원리적인 것을 제공했다면, 꼴리니는 그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긴 프랑스 위그노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프랑스 역사가 바뀔 수 있었을 …
꼴리니의 저격 장면.

프랑스, 개신교화 직전에 학살로 무너지다

종교 전쟁(1562년-1598년)과 바돌로메 대학살 1. 종교 전쟁 바시 대학살 이후, 학살의 주범 기즈가 1562년 3월 16일에 종교적 승리자가 된 것처럼 파리로 입성하자 위그노들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여 종교 전쟁이 시작된다. 이 전쟁은 여덟 번에 걸쳐 36년간 계속되다…

핍박받던 때 왕성하던 교회가 ‘종교자유’ 주어진 지금…

7. 오늘날의 바시 교회 후손들 바시 교회가 설립되던 당시 성탄절에 주변 도시 교인들을 포함하여 3천명이 모였다. 그리고 학살 당시 주일날에는 바시 인구의 12%에 해당되는 1,500명이 모였는데, 현 프랑스 교회 가운데 가장 큰 교회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바시 교…

바시 대학살, 역사는 잊지 않는다

주앙빌(Joinville) 지역의 영주인 프랑수와 기즈의 어머니 앙뚜와네뜨가 바시 마을을 조성하였으며, 마을 규모에 비해 거대한 대성당이 세워진 것은 로렌 지역의 추기경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앙뚜와네뜨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며 왕후였다가 미망인이 된 손녀 마리 …

바시 대학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562년 3월 1일 바시 대학살(Massacre de Wassy) 기즈(Guise) 가문은 조카인 스코틀랜드 여왕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를 통해 장기 집권을 꿈꾸며 스페인과 교황의 후원을 받아 가톨릭 당의 당수가 되지만 프랑스와 2세의 죽음으로 권력은 까뜨린에게 옮겨져 갔다. 까뜨…
세르베의 화형 장면.

“시대의 실수기도 한 그의 실수를 정죄하며”

앙리 2세의 치하에 수많은 개혁자들이 화형 당하던 가운데, 깔뱅이 사역했던 쥬네브에서도 종교적인 문제로 세르베를 화형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르베 화형 사건은 쥬네브 개혁 역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며, 깔뱅이 어떤 이유에서든 비난에서 벗…
위그노가 왕국의 허가를 받고 시작된 ‘족장의 집’ 교회.

왕궁의 교회 설립 허가, 그리고 가톨릭과의 충돌

뿌와시 종교 회의를 통하여 개신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하는 1562년 1월에 생 제르망 관용 칙령(édit de tolérance de Saint-Germain)이 내리기 전, 왕궁의 정치적 배려로 1561년에 두 곳의 교회 설립이 허락된다. 그 결과 개혁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된다. 1561년 12월…
깔뱅의 쥬네브 사역의 후계자인 베즈가 개신교를 대표하여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묵었던 왕궁 생 제르망 엉 레이 성(현재 선사 시대 역사 박물관). 베즈는 이 회의를 통하여 그의 존재가

개신교, 드디어 새로운 종교로 인정받다

1. 새로운 왕 샤흘르 9세(1550-1574)의 초기 재위 17개월에 후계자도 없이 사망한 프랑수와 2세를 이어 동생인 샤를르 9세가 10세의 나이로 1561년 5월에 왕위를 계승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즈 가문의 권력에 밀려 소외되어야 했던 2인자 모후 까뜨린 드 메디치(1519-1589)…

프랑수와 2세 시대의 상황과 종교 개혁

1) 프랑수와 2세(Francois II 1544 -1560)의 생애 프랑수와는 앙리 2세의 장남으로, 1559년 7월에 15세의 나이로 왕이 되지만 재위(在位) 17개월 만에 병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그는 14세 때 기즈 가문의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마리 스튜어트(Marie Stuart 1542…
 붉은 색으로 표시된 거리가 시위했던 거리이며, 파란색으로 표시된 거리는 총회가 열렸던 거리이다. 당시 이 거리들의 전방은 세느강까지 들판으로 형성되어 있어 왕궁이 바로 보였다.

극심한 박해도 식힐 수 없던 복음의 열정

1558년 5월에 나바르의 왕 Antoine de Bourbon의 지휘 아래, 위그노 지도자인 프랑수와 당델로를 포함한 수 천명의 위그노들이 시편 찬송을 하면서 왕궁과 세느강을 사이에 둔 Pré-aux-Clercs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1559년에는 안느 듀 부흐(Anne du Bourg)는 Antoine du Bourg …

앙리 2세의 시대적 상황과 개혁자들

왕의 차남으로 태어난 앙리는 마드리드 조약으로 인해 장남 프랑수아(François, Duc de Bretagne)와 함께 1526년에서 1530년까지 스페인에 머물게 된다. 어린 나이의 포로 생활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여 우울증을 갖게 하였다. 또 아버지와 어려운 관계로 웃음이 없는 …
프랑스에서 로렌 지역의 위치.

절대권력 휘두르던 종교 핍박자도 결국은…

프랑스 북쪽 국경 지역 로렌(Lorraine) 출신의 기즈 가문이 최고 권력 가문이 된 것은 끌로드 드 기즈(Claude de Guise 1496년-1550년) 때부터이다. 끌로드는 프랑수와 1세와 함께 유럽의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외교와 전쟁에 공헌한 댓가로 왕으로부터 많은 땅과 권력을 부여…

프랑수와 1세의 시대적 상황과 개혁자들

프랑수와의 어머니 루이즈(Louise de Savoie 1476-1531)는 프랑수와가 두 살 때 19세의 나이로 과부가 되어 아들 사랑에 극진하였고, 두 살 위인 누이 마흐규리트(1492년-1549년)도 동생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사진 : 프랑수와 1세(François I, 1494년-1547년). …
면죄부 판매 당시의 모습.

성모, 성인, 성상 숭배… 그리고 은혜에 의한 구원

몇 주에 걸쳐 프랑스 종교 개혁 당시 교회의 모습과 역사를 살펴보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동시에 교회와 왕들이 개혁자들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역사적 배경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당시 교회와 권력적 종교인들…
성 마들렌 교회. 이 교회는 1944년 9월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58년에 새로 건축됐고, 현재는 개혁교회가 아닌 가톨릭 교회이다.

깔뱅 생애 최고의 순간

깔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두번째로 머문 3년(1538년-1541년)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쥬네브(제네바) 사역의 아픔을 위로하시고 목회와 신학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갖게 하셔서 더욱 성숙하게 만드신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삶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하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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