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선교사의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 안식 (9) 존 웨슬리의 사바나 선교
아프리카 노예들 관문 사바나
식민지 수도답게 고색창연해
300년 전 이곳에 왔던 웨슬리
여성과의 스캔들로 선교 실패
선교, 말씀 회심과 내적 확신,
성령 역사와 영적 변화로 성공
하나님, 실패 성공으로 바꾸셔
가장 좋은 것, 하나님과 함께함
조지아주 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사바나는 오랫동안 내 영적 여행의 로망이었다. 그것은 이곳이 수많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을 거쳐 미국으로 들어온 슬픈 역사의 관문인 데다, 영국 존 웨슬리가 이곳에서 한 여성과의 스캔들로 인해 선교를 실패했다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후배 박 목사의 사바나 교회 집회(10. 11-13)를 위해 이곳에 온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초가을로 접어든 사바나는 식민지 시대의 수도답게 고색창연한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수염처럼 긴 잎을 지닌 Lover’s Oak 나무 숲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약 300년 전 이곳에 온 존 웨슬리를 떠올렸다.
웨슬리의 설교가 지금이라도 울려퍼질 것 같은 웨슬리 기념교회, ‘한 손엔 성경을,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람’을 초청하는 전형적인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이놀즈 광장의 웨슬리 동상은, 이곳이 과거 웨슬리의 선교지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건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자,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넓은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를 보자 오래 전 이곳에 선교사로 온 웨슬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웨슬리가 이곳에 온 것은 그가 32살인 1735년, 그의 아버지 별세 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해 10월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 그레이브 샌드항을 출발해 다음해 2월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시몬스호에서 겪은 일로 많은 도전과 충격을 받았다.
배가 대서양 한복판을 지날 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 좌초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움 없이 평안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웨슬리는 그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었는데, 돛이 찢기고 바닷물이 삼킬 듯 갑판 위로 쏟아져도, 그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찬양과 기도를 쉬지 않았다. 웨슬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당신들은 두렵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아니요, 우리는 우리가 죽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배가 사바나에 도착하자, 웨슬리는 자신의 신앙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는 것을 알고 스팽겐베르크 목사를 찾아갔다. 그때 스팽겐베르크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성령께서 친히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고 믿습니까?” 웨슬리는 이때 무슨 말로 대답할지 몰라 주저했다.
그때 스팽겐베르크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웨슬리가 대답했다. “예. 그는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러자 스팽겐베르크가 또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습니까?” 웨슬리는 이때 자신없는 말투로 “예. 알죠”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영적 생활을 향해 그렇게 심각하게 질문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바나 선교는 어쩌면 그의 확신 없는 대답의 당연한 결과였다. 겉으로 본 그의 사바나 선교는 열심과 함께 큰 성과도 있었다. 신자들은 사치를 멀리하고, 귀부인들은 검소한 의복으로 예배 때마다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주간학교를 열어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고, 주일은 오전 5시 새벽기도, 11시 성찬식과 설교를 실시했고, 오후 1시에는 프랑스인 예배, 2시에는 유년 교리문답, 3시에는 기도회, 6시에는 모라비안인 교회에 출석했다.
토요일에는 사바나 부근에 있는 2개 마을에 들러 독일인과 프랑스인들의 기도회를 인도했으며, 스페인 출신 유대인 전도를 목적으로 스페인어로 공부했다. 밖에서 볼 때 웨슬리의 선교는 매우 활동적이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웨슬리의 사바나 선교는 실패였다.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지나친 엄격주의. 웨슬리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했지만, 신자들을 부드러운 젖으로 먹이지 않고 극단적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의 단단한 빵으로 먹였다.
그는 영국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찬을 허락지 않았으며, 장례 예배조차 거절했다. 국교도 자녀에게는 다시 세례를 줬다.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해야 했고, 생활은 규칙적이고 검증적이어야 했다.
때맞춰 일어난 연애 사건은 그의 선교를 불명예스러운 스캔들로 마치게 했다. 그는 사바나 식민지 장관의 딸 소피아 합키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끝나자 연애 사건은 곧 고소 사건이 되었다. 다행히 사건은 기각됐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영적 권위를 잃었고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
다시 멀리 바다를 바라봤다. 때마침 여객선 하나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웨슬리는 회한에 찬 눈물을 흘리며 실패감을 가득 안고 여기서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의 사바나 선교가 가르쳐 주는 것은, 선교사가 공부를 많이 하고(그는 옥스포드 출신이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많이 하고(그는 옥스퍼드에서 동료들과 규칙적으로 살아 methodist라 불렸다), 부지런히 일하고 많은 성과가 있다 해서 선교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회심과 내적 확신, 그리고 성령의 역사, 그로 인한 영적 변화 없이, 선교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셨다. 사바나는 그에게 쓰라린 실패를 안겨 주었지만, 하나님은 올더스케이트(1738. 5. 24)를 통해 그를 영국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셨다.
바닷가를 떠나면서 웨슬리 일생에 뼈아픈 영적 전환점이 되었던 사바나가 나에게도 선교와 삶의 전환점이 되기를 기도했다. 아울러 선교 현장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감과 좌절감으로 낙심하고 있는 동역자들에게, 당신들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고 위로를 드리고 싶다.
훗날 웨슬리가 경험한 대로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그가 훗날 믿은 대로 우리가 만일 일생 동안 죄를 무서워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한다면, 웨슬리가 숨을 거둘 때 마지막으로 한 처럼 우리가 만일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이라 믿고 그렇게 산다면, 하나님은 가끔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해도 분명 우리를 통해 끝내 승리하실 것이다.
이윤재 선교사
우간다 쿠미대학 신학부 학장
Grace Mission International 디렉터
분당 한신교회 전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