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한 점의 그림] 천병근과 김기창 등
1. 일제 가혹한 탄압으로 활동 못해
2. 월남 미술인들 이주로 활기 생겨
3. 제헌 국회부터 신앙의 자유 공인
한국 크리스천 미술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은 해방을 전후로 해서이며, 더 자세히는 6.25 전쟁을 전후해 크리스천 작가들이 급증하고 작품 발표도 활발해지면서다.
해방 이후 기독교의 역사를 살핀 김양선 목사의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1956)』 중에는 특별히 기독교 문화사업 부문을 따로 기술하고 있다. 기독교 방송에서부터 기독교 박물관, 기독교 음악, 기독교 문화, 기독교 출판, 기독교 문화단체, 그리고 기독교 미술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종교미술로는 6.25 사변까지 약 25년간 중앙기독교청년회관 회랑에 걸려 있던 이당 김은호 화백의 ‘예수 승천도’ 가 이 땅의 기독교미술을 웅변했다고 운을 뗀 다음, “해방과 함께 우리 교회는 우수한 기독교미술을 탄생시킨 천재화가 천병근, 김기창 양 화백을 가졌다”며 천병근의 <기독 의용사>(1950),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1952-1953)를 소개했다.
이어 이연호 목사의 “해방 10년의 회상”(『기독교계』, 1957. 8월호)에서도 당시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연호 목사는 해방 후 크리스천 미술 활동에 대해 김은호를 언급한 다음 천병근·김기창의 대표작을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언급했다. 김기창은 전쟁 기간 중 <예수 일대기>를 완성했고, 천병근의 <기독 의용사>, <세례>(1951), <어린양>(1951), <삶>(1953) 등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고 했다.
덧붙여 장운상이 예수 탄생 장면을 성탄카드로 제작한 점, 이연호가 1955년 동방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과 1950년 이후 『타임』과 그밖의 외국잡지에서 그의 작품을 보도한 점, 문자화가 이광혁이 화면에 성경구절을 한글로 일일이 새겨 형태화한 <마태복음>(1952), <요한복음>(1952), <누가복음>(1956), <기독전신상>(1957) 등을 소개하였다. 이연호는 흥미롭게 이들을 유럽의 화가들과 비교하기도 했는데, 김기창을 들라크루아, 장운상을 루벤스, 천병근을 마네시에, 이광혁을 프라 안젤리코와 같다고 했다.
해방 후 교회에서도 교육용으로 시각예술을 적극 활용했다. 이연호는 성화연구사를 초창기 기독교미술에 공헌한 단체로 들면서 “인쇄술이 졸렬한 한국에서 여러 악조건과 싸우며 금일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성화 제작사에서 주최한 “시각전도를 위한 화극(畫劇) 모임이 작년에 있었으나 응모 9점중 4점이 당선되었다”고 소개했다.
여기서 ‘화극’이란 딱딱한 종이에 연속적으로 그린 그림을 상자 모양의 틀 속에 넣어 순서대로 한 장씩 어린이들에게 보이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연놀이를 말한다. 이 동화그림 놀이는 ‘기미시바이(かみしばい, 종이연극, 조희연극)’로 불리며 일제 말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전세(戰勢)가 기울자 다급해진 일본 총독부는 국민정신 총동원의 일환으로 ‘기미시바이’를 내세워 전시 선전수단에 사용했다.
국내에는 해방이 되어서도 일제 말기 전시 체제적 문화가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미시바이’는 관동대지진(1923)과 쇼와 공황(1927)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엿장수(飴売り)가 어린이의 관심을 끄는 오락용으로 발명됐고, 그 후 교육적인 목적이나 신앙 전도를 위해 제작된 ‘교육 기미시바이’로 발전됐다.
이연호가 ‘시각전도를 위한 화극’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작가 히라사와 사다하루(平澤定治)를 언급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이연호가 한국 작가의 화극을 말할 때, 일본의 전도용 ‘교육 기미시바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출품작 수준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작품의 수준에 있어서 한국은 아직도 전도요원의 감이 있다”고 하여 응모된 ‘화극’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김양선, 이연호 목사가 기술한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크리스천 작가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일제강점기에는 보기 힘들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작가들의 활동을 촉진시킨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 일제 때는 기독교에 대한 가혹한 탄압에 작가들이 힘을 쓸 수 없었다. 일제 말기에는 한국교회 천황화 실천 발표, 예배 전 동방요배, 교인 집마다 작은 신사 설치, 사상범 구금령, 일본적 기독교로 바꿀 것 요구, 교회 전쟁물자 헌납, 교회 종 공출, 서양 선교사 추방, 지도급 목사의 신사건축 동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다.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은 전국적 규모로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한국교회 해산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크리스천의 사회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소수 크리스천 예술가들도 이에 실망해 소극적으로 활동하거나 조용히 지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자, 비로소 크리스천 작가들이 기지개를 펴며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월남 미술인들의 이주이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북한 지역에 진을 친 소련군과 그들의 공산화 전략은 한국교회사에 참담한 비극을 안겨줬다. 공산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희생은 엄청났고, 전쟁 직전에는 정점을 찍었다. 신자들에 대한 감시와 세뇌 공작, 교회 재산의 몰수, 성직자 및 지도자들에 대한 심문과 납치, 학살, 살해 등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다(백상현, “북한정권의 교회탄압”, 국민일보, 2015. 8. 19).
핍박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던 크리스천들은 6.25 전쟁 기간 중 월남했다. 이 가운데는 박수근, 홍종명, 김학수, 윤중식, 황용엽, 황유엽, 박고석, 신영헌, 정규, 이정수 등 미술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한 교세를 자랑했던 북한 지역은 신자 규모에 있어서도 남한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월남 미술인 가운데는 본인이 크리스천이거나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월남 미술인들은 남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호방하고 토속적인 조형 특성으로 미술계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었다.
셋째,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것이다. 제헌국회가 마련한 헌법 초안 제12조는 “제1항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현행 헌법 제20조 제1항 참조)”고 되어 있다. 헌법 초안에 규정된 종교자유 조항은 각 기관과 미군정의 종교자유 원칙을 반영한 것으로, 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이 헌법 초안은 제헌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대한민국 헌법’으로 확정되었다(방성주, 양준석, “1948년 종교의 자유 조항 제정의 정치사”, 『한국정치학회보』 53집 5호, 2019, 118쪽).
좌익 계열 연합체 민주주의 민족전선 역시 헌법 시안에 종교자유 조항을 규정했으나, ‘국가질서와 인민의 이익에 배반되지 않는 범위’라는 단서조건을 달았다(같은 논문, 113쪽). 공동의장 박헌영은 ‘종교가 과학의 진리와 배치된다’는 인식을 갖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는데, 그가 말한 ‘인민’은 자본주의 착취계급인 부르주아와 대척지점에 놓인 노동자, 농민, 소시민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인민의 이익을 배반’하지 않는, 즉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투쟁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독소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이 안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타협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사라지고 말았다.
건국 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명문화한 것은 국민의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 각 방면에 크리스천의 사회적 참여를 가져온 것처럼, 예술 분야에서도 크리스천들이 예술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우호적 환경을 마련했던 것이다.
서성록 명예교수
안동대 미술학과